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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00년 전 인도승려가 도착한 땅, 그곳의 마라난타사와 불갑사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㉔ 전남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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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마라난타사 전경.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먼 옛날 백제에 처음 불교를 알린 것을 기념해 조성된 곳이다.

호남에는 3불(佛)과 3갑(甲)이 있다.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다. 3불은 영광의 불갑사(佛甲寺), 나주의 불회사(佛會寺), 군산의 불주사(佛住寺)를 일컬으며 백제에 불교를 전파한 마라난타가 창건했다고 알려진 절이다. 3갑은 도선국사(827~898)와 관련된 사찰로 불갑사(佛甲寺)를 비롯해 영암 도갑사(道岬寺), 보성 봉갑사(鳳甲寺)를 말한다. 그 중에서도 불갑사를 ‘부처님이 제일 먼저 나타난 절’로 으뜸 여겼다.

우리 주위에 불교 관련 지명, 산 이름 등이 의외로 많다. 1700년 오랜 역사와 함께하다 보니 생활 속에 뿌리내려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된 셈이다.

‘불법이 들어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전남 영광의 법성포(法聖浦)도 그 가운데 하나다. 백제불교가 법성포를 통해 전래됐다. 백제 시절 지명은 ‘아미타불’의 의미를 함축한 아무포(阿無浦)였다. 그래서인지 신령스러운 빛의 고을이라는 영광(靈光)의 지명까지도 불교와 연관짓는 이들이 있다. 법성포와 바로 인접한 백수읍에는 원불교를 창시한 소태산의 탄생지인 ‘영산 성지’가 있는 걸 보면 이 지역이 불교와 깊은 인연이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법성포에는 마라난타의 불교 전래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마라난타사’가 있고 백제불교 발상지로 여겨지는 불갑사도 가까이에 있다. 최근 두 곳을 다녀왔다.

영광대교와 서해바다

백제불교의 시작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 티베트계가 세운 국가인 전진(前秦)의 왕 부견이 순도라는 승려를 통해서 한반도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 백제에는 침류왕 원년(384년)에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했고 신라에서는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이 신라 최초 사찰인 도리사를 창건(417년)하며 불교를 알렸다. 그러나 신라에선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가 백성들 사이에서만 퍼지다가 법흥왕 14년(527년)에야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받았다.

삼국유사엔 김수로왕 시절 인도 공주 허황옥과 장유화상이 서기 48년에 가야국에 불교를 처음 전파하였고 지리산 칠불사(운성원)에서 서기 103년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이야기도 내려온다. 삼국사기는 왕실이 불교를 받아들인 연도를 중심으로 기록한 것이기에 실제 한반도에 불교가 처음 소개된 시점을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영광 법성포 서해 바다가 바라보이는 숲쟁이길에 들어서면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법성포는 인도 간다라의 고승 마라난타가 남중국 동진을 거처 백제에 최초로 발을 디딘 곳이다.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가리킨다고 한다. 영광군에서는 이를 기념하고 성역화하기 위해 지난 2006년 숲쟁이숲 인근 4230평 되는 땅을 활용해 마라난타사를 조성했다.

마라난타사 조성 사업이 진행 중이던 2003년의 모습 [연합]

간다라풍으로 만들어진 상징문이 이 절의 일주문 역할을 한다. 문을 지나면 대승불교의 본고장인 간다라의 불교 유물을 전시한 간다라 유물관과, 꼭대기에 사자상을 얹어놓은 상징탑인 아소카 석주가 나온다. 이국적인 정취가 묻어난다. 절 안쪽 깊숙한 자리에 불탑과 감실형 불당으로 구성된 탑원(塔園)이 있는데 불상과 소탑을 봉안하는 작은 공간의 감실형 불당들이 있다. 이곳은 중앙탑을 바라보며 승려가 수행하던 작은 굴이라고 한다. 탑원은 인도 간다라 지역 사원 유구(옛 토목건축의 잔존물) 가운데 가장 잘 남아있는 ‘탁트히바히 사원’의 탑원을 본떠 조성한 것이다. 인도 간다라 지역 사원 양식의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마라난타사의 입구(상징문)
마라난타사 광장에 세워진 아소카 석주. 꼭대기에 사자상을 얹어놓았다.

영광대교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지붕 위에 4면이 불상으로 된 사면대불상(四面大佛像)을 세운 건물은 보수 공사가 중단된 듯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아쉽다. 언덕 아래 자리 잡은 누각 2층엔 불당이 있고 아래층 4면은 석가 일대기를 조각한 부용루가 서해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아래쪽 만다라 광장 조경은 바다 전망 등과 잘 어우러져 보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한다. 화사한 튤립이 정갈하고 조화롭게 화단을 채우고 있어 관광객들에겐 아름다운 포토존이 된다. 바다를 접하는 지점에 있는 정자, 존자정(尊者亭) 안에는 범종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존자는 부처의 제자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백제 최초의 절, 불갑사

불갑사 일주문

이제는 불갑사로 간다. 법성포에서 자동차로 20여 분, 광주에서 50여 분 거리 영광읍 인근의 불갑산(516m)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인 백양사의 말사다. 불갑사창설유서(佛甲寺創設由緖)에 의하면 마라난타가 최초로 창건한 백제 불교 초전성지(初傳聖地)라 하여 부처불(佛) 첫째 갑(甲)자를 써서 절 이름 지었다. 이 절이 크게 번창한 것은 고려 말 각진국사(覺眞國師)에 의해서다. 당시 이 절에는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렀고, 사전(寺田)이 10리에 미치고 40여 동의 가람과 31개의 암자가 있어 ‘불가의 종가집’이라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불갑저수지 주변의 화사한 벚꽃터널을 감상하며 불갑천을 끼고 가다 보면 독특한 불갑사 일주문을 만난다. 사찰이 소재한 산 이름은 없고 사찰명만 세로로 쓴 현판을 걸어놓았다. 짐작컨대 불갑사가 자리잡은 산을 영광에선 불갑산이라 하고 함평에선 모악산이라 부르는 까닭에 산명은 뺀 듯하다. 어쨌든 등산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산이다.

불갑사 경내
범종루의 대법고

일주문 주변에 20여 개의 아기자기한 상품들이 진열된 주말장터가 열렸다. 일주문에서 상사화 교육홍보관, 영광산림박물관 등을 지나쳐 1km쯤 걸으면 금강문-천왕문-만세루-대웅전에 이른다.

고종 1년에 불갑사를 중수할 때 설화를 간직한 전북의 폐사지에서 커다란 ‘목조 사천왕상’을 옮겨왔다. 범종루에는 1700년대에 만들어진 고색창연한 대법고가 걸려 있다.

보물로 지정된 불갑사 대웅전 지붕 용마루에는 남방불교 양식의 작은 석탑과 보리수를 새긴 삼존불대(三尊佛臺)가 있다. 화려한 꽃살문과 교살문 창호가 특별한다. 과거 기술자들의 뛰어난 조각 솜씨를 가늠할 수 있다.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삼존불(보물)은 전각의 정면을 향하여 있지 않고 측면(남쪽)을 향해 있어 어디로 법당에 출입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대개의 사찰 불단은 남쪽을 향하게 하고 있으나 이곳 대웅전은 마라난타가 도착한 서해 바다를 향하고 있어 불단만이라도 방향을 맞추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대웅전 현판
불갑사 대웅전 내부의 금불

불갑사를 크게 중창하여 추앙받는 각진국사의 추모비는 오랜 역사를 반증하듯 상처 입은 채 대웅전과 향로전 사이에 투박하게 세워져 있다. 경내에 오래된 목련꽃이 아름답다 했는데 때이른 고온으로 꽃잎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대웅전 뒤에는 각진국사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700여 년의 참식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군락지를 이루고 있다. 여기서 전일암(餞日庵)과 증지암(證智庵)으로 이동할 수 있고 불갑사제(저수지)를 지나 산 정상(연실봉) 방면으로 올라 해불암(海佛庵)에 닿을 수도 있다.

불갑사는 많은 문화재와 15동의 건물이 있는 큰 사찰이며 많은 신도와 관광객이 찾는 지역의 명소다. 만당 주지스님도 조계종 총무원의 종단 불사추진위 총도감과 한국불교문화사업단장 등 중책을 맡아 ‘조계종 선명상 프로그램’을 통한 불교의 대중화 사업 등을 책임지고 있다.

꽃무릇과 호랑이

불갑사 일주문을 지나고 상사화길 계곡 초입 언덕에는 호랑이굴과 호랑이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1908년 불갑산 덕고개에서 한 농부가 호랑이를 잡았는데, 그 호랑이는 박제해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두고 모형을 제작해서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로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불갑사 계곡 양옆으로 상사화 밭이 지천으로 조성되어 있다. ‘꽃무릇’으로 많이 알려진 상사화는 잎이 있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있을 때는 잎이 없다. 잎은 꽃을 생각하고 꽃은 잎을 생각한다고 해서 애틋하고 간절한 사랑을 상징한다. 상사화 뿌리에는 독이 있어 방충효과를 위해 단청이나 불화(佛畫)를 그릴 때 많이 사용하는 까닭에 사찰에선 ‘절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고창에 선운사, 함평 용천사, 영광 불갑사 등 사찰마다 상사화가 유명하지만 단연 으뜸은 불갑사다.

매년 9월 중순 추석 전후, 일주문에서 불갑산 정상 가는 길목 해불암까지 약 3만평 정도가 꽃무릇으로 붉게 물드는 전국 최대의 상사화 자생 군락지가 펼쳐진다. 필자도 일전 상사화 붉게 핀 가을에 몇 번 찾았지만 늘 이 일대 교통이 마비되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비록 지금은 잎만 무성한 상사화 밭이지만 산책코스로는 최고여서 가을 풍경을 상상하며 아쉬움을 달래본다. 매년 약전차(불갑사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어 온 차) 축제 행사도 열린다. 우리나라 사찰은 ‘비움을 이야기하고 낭만을 노래한다’고 하는데 불갑사는 그러한 의미의 절로선 최적인 듯하다.

“ 꽃이 되고 싶다

꼭 한가지 꽃이 되고 싶다

천년을 딱 한사람만 기다리는

그런 사랑의 꽃이고 싶다...”

영광 문화원장을 지냈고 불갑사 상사화 조성에 앞장섰던 정형택 시인의 상사화 연작시 중 일부다.

법성포의 유채밭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영광 하면 굴비다. 법성포는 굴비의 집산지라는 명성답게 굴비 판매상들이 길가에 즐비하다. 굴비 정식을 파는 대형 식당들 또한 전국에서 모인 식도락가들을 유혹하며 간장게장과 굴비구이, 조기탕, 부서굴비와 맛깔난 산나물, 돌솥밥이 어우러진 푸짐한 상차림으로 입맛을 돋운다. 식당가 뒤엔 유채꽃밭이 있는데 재잘거리며 사진 찍는 연인들의 모습이 정겹다. 얼마 후면 금계국이 법성포 숲쟁이숲을 노랗게 물들일 것이고 노을이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인 백수해안도로에는 분홍빛 해당화가 자태를 뽐낼 것이다.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만해 한용운이 노래한 ‘해당화’ 한 구절이 떠오르는 계절이다.

글·사진 = ㈜헤럴드 정용식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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