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제주도가 가라앉는대.” 어느 날 저녁 식탁에서 불쑥 아이가 꺼낸 말이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제주도 해수면은 1990년 이후 매년 5㎜ 이상 상승해왔다. 최근 30년간 15㎝나 상승한 제주도 해수면. 제주도 연안 지역의 37%가 해수면 상승에 따른 취약지역이란 연구결과도 있다. 이유는 온실가스 배출. 학교에서 이를 배운 모양이다. “그러게, 어떡하지.” 큰 감흥 없는 답변 속, 무심히 지나갔던 여느 날과 다름없는 저녁 자리였다.
그 뒤로 아이가 변했다. 에어컨을 켤 때마다 아이의 잔소리가 쏟아졌다. 종이팩과 페트병 뚜껑을 따로 모으는 걸 목도한 후 ‘분리배출 감시인’을 자처했다. 분리배출할 때마다 등쌀에 시달린다. “지구를 걱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어?”, “어제보단 더 많이 늘었어?”, “왜 환경을 아끼는 걸 귀찮아해?” 점점 답하기 난감한 질문들이 늘고 있다. 나부터 변하지 않으면,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이제 8살 아이 눈엔 어른들보다 지구의 아픔이 더 잘 보이는가 보다. 집을 잃어가는 북극곰이 아른거리고, 목에 빨대가 꽂힌 바다거북에 슬퍼한다. 진심으로. 그리고 실천한다. 할 수 있는 것부터. 에어컨을 끄고, 자전거를 타며, 재활용품을 세심히 챙긴다. 아이를 지켜보며 반성했다. 어른들이 미안해.
그 덕분에 우리 가족도 변하고 있다. 좀 더 불편해질 용기가 생겼다. 배달을 줄이고 음식을 가지러 가며, 집 안에서 양말을 신고 내복을 입는다. 박스에 붙은 테이프를 떼기 시작했고, 머그컵을 가방에 넣고 다닌다. 아이와 밥상에서 나눌 얘기도 늘었다. “지구를 걱정하는 사람이 늘고 있어. 어제보다 많이 늘었지.” 이젠 아이에 답할 명분도 생겼다. 내심 뿌듯하다.
지난 25일엔 아파트 외 주택가에서도 투명페트병 분리배출 의무화가 도입됐다. 페트병은 취합해 장섬유로 가공, 고품질의 재생원료로 생산할 수 있다. 이미 다수 유명 의류 브랜드마다 앞다퉈 페트병을 활용한 의류를 판매 중이다. 가방, 신발, 카시트 등 제품군도 늘고 있다. 다만, 유색 페트병과 혼합되면 색상 활용 등에 어려움이 많다. 그래서 투명 페트병만 분리배출하게 됐다. 페트병 재활용 수요는 늘고 있는데, 공급이 부족하니 이를 수입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작년 페트 수입량은 6만6700t에 이른다. 배출된 페트병 자체가 부족한 게 아니다. 제대로 분리배출된 페트병이 부족한 게 문제다. 라벨이 붙어 있거나 이물질이 섞여 있으면 재활용할 수가 없다. 이를 정리하는 데에 비용이 더 든다.
지난 주말 아이와 함께 동네를 거닐며 재활용품 수거함들을 살펴봤다. 왜 투명 페트병만 따로 분리해야 하는지, 수거된 페트병이 어떻게 쓰이는지 설명해줬다. “내가 따로 모아줄까?” 페트병과 다른 플라스틱이 뒤섞여 있는 배출함을 보며 아이가 꺼낸 말이다. 남이 버린 것들이라도 손을 거들고픈, 아이의 마음이다.
작년 아파트에서 투명 페트병 분리배출을 의무화한 후 한 해 동안 페트 수입량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다. 이제 주택가까지 자리 잡는다면, 더 큰 변화를 이끌 수 있겠다. 우리가 불편해질 준비, 지구가 편해질 시작.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