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나무, 물고기, 달’ 

보편타당한 이야기ㆍ전통의 문법 깬 음악

‘오늘의 창극’ 제시한 새로운 시도와 발견

보편적 스토리·전통 깬 음악…국립창극단의 새로운 시도
국립창극단의 2021년 신작 '나무, 달, 물고기'는 인도, 한국, 중국 설화를 차용한 보편적 스토리에 전통음악의 틀을 깬 아름다운 선율의 조화로 관객을 새로운 창극의 세계로 이끈다. [국립극장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가난이 친구였던 소녀, 108마리 소를 가졌지만 ‘진짜 가족’은 없다고 생각하는 소년, 메마른 가지를 안고 견딘 나무, 아직 진리를 구하지 못한 순례자가 길 위에서 만났다. 저마다의 사연 안엔 고단한 현실과 가지지 못한 꿈이 담겼다. “고슬고슬한 쌀밥을 먹고픈”(소녀) 소박한 꿈, “진짜 가족과 진짜 행복”(소년)을 향한 갈망, “앙상한 가지 위에 피우고 싶은 꽃 한 송이”(사슴나무)에 대한 미련은 길을 떠나는 이유였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미지의 세계. 전설처럼 이어져 풍문으로만 떠돌던 곳, 누구도 가보지 않은 그곳으로 소원을 이뤄준다는 나무를 찾아나선다.

국립창극단의 올해 첫 작품 ‘나무, 물고기, 달’은 가상의 공간 수미산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소원나무’를 찾아가는 주인공들의 여정을 담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은 ‘단순한 구조’에 ‘보편타탕한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이다. 90분의 짧은 극 안에서 소원나무로 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는 전 세계 어디에 살든,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스토리다.

연출을 맡은 배요섭의 ‘부캐’인 김춘봉 작가는 ‘나무, 물고기, 달’의 극본을 쓰며 인도의 신화 ‘칼파 타루’에서 소원나무를 차용했고, 등장인물이 깨달음을 얻고 성장하는 설정은 제주 구전신화 ‘원천강본풀이’에서 영감을 얻었다. 중국의 설화 모티브도 극에 쓰였다. 전체 구성은 ‘오즈의 마법사’를 닮았다. 마법사를 만나기 위해 오즈로 향하는 도로시의 여정에 사자와 허수아비도 저마다의 소원을 안고 함께한 것과 다르지 않다.

보편적 스토리·전통 깬 음악…국립창극단의 새로운 시도
국립창극단의 2021년 신작 '나무, 달, 물고기'는 인도, 한국, 중국 설화를 차용한 보편적 스토리에 전통음악의 틀을 깬 아름다운 선율의 조화로 관객을 새로운 창극의 세계로 이끈다. [국립극장 제공]

주인공들의 사연은 ‘환상 동화’처럼 풀어냈다. 작품을 보다 신비롭게 하는 요소들이 보편적 스토리를 특별하게 매만진다. 자신을 ‘금어’로 부르며 여행자들을 안내하는 물고기와 사슴이 치고 들어가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된 사슴나무, 마침내 만나게 될 소원나무의 존재가 그렇다.

극의 장점은 지지부진하게 이야기를 끌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리꾼의 몇 마디로 장면이 바뀌고, 서사가 전개된다. 그런 만큼 스토리가 단조롭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클라이맥스는 소원나무 앞에 도달했을 때다. ‘나무, 물고기, 달’은 이 순간을 위해 달려온 것처럼 본격적인 메시지를 쏟아낸다. 소원나무 앞에 선 이들은 속마음을 들킨다. 햄버거에 주먹밥, 비단이불과 아름다운 여인, 동백꽃과 홍매화…. 마음속에서 키워온 모든 것을 향한 욕망이 소원나무 앞에 펼쳐진다. 이쯤에서 다시 극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소리꾼들은 극 초반 ‘재가 된 인생’을 떠나보내듯 곡을 했다. “아이고 어쩌끄나. 또 한 인생 바스라졌네. 힘들게 여기까지 와서 고작 햄버거 하나 먹고 갔네.” 작품은 소원을 이루면 과연 우리 삶은 행복할 수 있을지, 당장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햄버거 하나와 삶을 맞바꾸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지 묻는다. 그러면서 욕망, 결핍도 그리고 두려움도 “그저 바라보면 사라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고 말한다. ‘진정한 행복’은 당장의 결핍을 채우는 비단이불이 아닐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그럼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 답을 얻지 못한 우리는 언제든 다시 ‘소원나무’를 향한 여정을 떠날지 모른다. 내 안의 결핍이 삶의 모든 순간을 지배하니, ‘비우면 보이고, 진정한 행복은 마음먹기 달렸다’는 뻔한 메시지를 얻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것을 몰라 실수도 반복하는 인생이기에 ‘나무, 물고기, 달’은 어느 곳에서나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보편적 스토리·전통 깬 음악…국립창극단의 새로운 시도
국립창극단의 2021년 신작 '나무, 달, 물고기'는 인도, 한국, 중국 설화를 차용한 보편적 스토리에 전통음악의 틀을 깬 아름다운 선율의 조화로 관객을 새로운 창극의 세계로 이끈다. [국립극장 제공]

주인공들이 부지런히 소원나무를 찾아가는 동안 ‘든든한 동반자’가 돼준 것은 음악이다. 90분을 강력하게 아우른 30여곡의 새로운 음악들은 관객을 아름다운 창극의 세계로 인도한다. 작창, 작곡, 음악감독을 맡은 이자람은 “이 정도 선까지 넘어보면 어떨까?”라는 시도를 해봤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작품은 ‘창극, 혹은 소리는 무엇인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진다. 창극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이 막연히 창극을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것이라는 편견이 있었다면, ‘나무, 물고기, 달’은 그런 선입견을 가차없이 깨부순다. 전통 판소리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난 아름다운 선율은 극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몰입도를 높인다. 국립창극단 단원들이 쌓아올리는 화음은 압권이다. 사슴나무 역할을 맡은 두 배우(왕윤정, 김우정)이 자신들의 서글픈 사연을 풀어내는 장면은 90분 안에서 가장 격정적이다. 장조와 단조를 오가는 선율, 완벽하게 어우러져 마치 한 사람이 두 개의 소리를 내는 듯한 화음은 좌중을 압도한다. 소리의 빈공간을 메우기도 하고 때로는 주인공이 되기도 한 악사들의 연주 역시 매혹적이다.

국립창극단의 이번 신작은 지금 이 시대의 창극이 걸어가는 새로운 길의 연장선이다. 가장 한국적인 문화에, 보편적 이야기, 기발한 상상력을 더해 전통이 규정한 울타리를 넘었다. 창극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소리는 부르는 주체를 제외하곤 파격적 시도를 서슴치 않았다. 아름다운 음악은 단순한 이야기 구조를 정성스레 엮어 깊은 충만함을 준다. ‘나무, 물고기, 달’은 전통 안에서 매순간 ‘오늘의 창극’을 고민해온 국립창극단의 성공적 시도이자 새로운 발견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