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자폐성 장애인 6명, 지하철역 청소노동 -“월급받아 가족에 선물…취미생활도 즐겨요” -“사람들과 함께…사회성도 좋아져 일석이조” [헤럴드경제=정세희 기자] “집에서 양치질하고 설거지하고 심심했어요.” 자폐성 장애를 갖고 있는 고영욱(20) 씨가 분홍색 고무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빗자루를 들고 지하철역 승강장 바닥을 쓸기 시작했다. 순간 고 씨의 눈빛이 달라졌다. 바닥 곳곳을 매섭게 훑더니 떨어진 작은 종이조각을 발견하자 얼른 집었다. 그렇게 일하는 게 좋느냐는 질문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네! 네! 네!”라고 답했다.
지난달 30일 오후 ‘특별’한 청소 노동자가 있다는 서울 지하철 을지로4가역을 찾았다. 이곳은 발달장애를 가진 20대 6명의 일터다. 이들은 발달장애일자리 지원을 돕는 커리어플러스센터를 통해 지난 1월 17일부터 지하철 청소업체인 그린환경에 취업했다. 6개월의 인턴 기간이 끝나면 평가를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이 된다. 지하철역에서 발달장애인 인턴제를 운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예쁜 소녀들에게 관심이 많은 환경원 이한울입니다.” 이한울(21) 씨는 자폐증을 갖고 있지만 친화력이 좋고 외향적인 편이다. 자신을 이성 친구에게 관심이 많다고 소개할 정도로 표현력도 좋다. 지하철 승강장 입구 쪽을 대걸레질을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잠시만 비켜주세요”라는 말도 잘 건넨다.
첫 월급을 받고서 무엇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환한 표정으로 만화 캐릭터들을 볼 수 있는 ‘2018 코믹월드’를 다녀왔다고 말했다. 말투는 어눌했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표현했다.
민재현(21) 씨는 자신이 번 돈으로 처음 쇼핑을 했다. 그는 청바지를 가리키며 “청바지, 옷을 샀다”며 웃었다. 옆에 있던 영욱 씨는 큰 목소리로 “아이스크림!”이라고 말했다. 월급을 받고 좋아하는 슈팅스타 아이스크림을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는 얘기다.
물론 일하는 게 항상 즐거운 것은 아니다. 출퇴근길 사람들이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이내 쓰레기는 한 더미가 된다. 넘치는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다 비우지 않은 커피 컵이 휴지통을 적셔 더러워진 쓰레기들을 치우려면 곤욕이다.
이들은 힘들어도 월급을 받을 생각을 하면 에너지가 난다고 입을 모았다. 보통 직장인과 똑같다. 한울 씨는 6개월 뒤 정규직 전환이 안 되면 어떨 것 같느냐는 질문에 “돈을 벌어서 만화를 볼 수 있어서 좋았는데…. 너무 슬플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월급 못 받잖아요. 기분 안 좋죠. 약속은 중요한 거예요”라고 말했다.
영욱 씨는 “분리수거 할 게 너무 많으면 힘들지만 돈 버는 일”이라고 말했다. 노동의 대가가 소중하다는 것을 그는 이미 배운 듯했다. 진지한 표정에 늠름하고 어른스러운 성격이 묻어났다.
5호선 승강장 옆 복도를 담당하고 있는 재현 씨는 쓰레기를 분리수거 하는 게 오히려 “재밌다”고 했다. 정리정돈 하는 것에 성취감을 느끼는 그에게 청소 일은 적성에 잘 맞는 일이었다.
이들에게 일하면서 겪는 수고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일을 안 했을 때 느끼는 외로움과 소외감이 더 컸다. 실제 발달장애인 일자리는 매우 부족한 현실이다. 특히 지하철 역처럼 지역사회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일자리는 거의 전무하다. 사회성을 기르는 게 중요한 이들에게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일은 중요하지만, 창고에서 물류 포장을 하는 등 고립된 일자리들이 많다. 물론 이마저도 경쟁이 치열하다.
이들에게 일이란 돈 버는 수단과 동시에 이웃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심정구 커리어플로스센터 잡코치는 “발달장애 친구들은 누구나 비장애인들과 함께 일하고 싶어한다. 특히 친구들의 사회성을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준다”며 “발달장애 친구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일을 하면서 사회성이 확연히 좋아진 친구들도 많았다. 영욱 씨만 해도 처음 일자리 훈련을 받았을 때 빗자루질을 조금 하다가 그만두는 일이 잦았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 맡은 구역을 모두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게 됐다.
심 코치는 “발달장애 친구들에 대한 약간의 관심과 이해만 있으면 함께 일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고 했다. 그는 “발달 장애친구들이 몸짓이 크거나 화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데 이들의 표현방식일 뿐, 함께 지내면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편견을 버리는 게 중요하다. 이들은 조금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다”고 강조했다.
청소 일을 시작한지 1시간이 지났을까. 승강장 입구 바닥을 대걸레질을 하던 한울 씨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울 씨는 “깨끗해질 수록 에너지가 소모된다”고 지친 듯 말했다. 조금 쉬는 게 어떻느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그는 “그럴 때마다 마음 속에서 소녀들이 응원을 보내기 때문에 괜찮다”고 해맑게 웃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캐릭터 주인공을 가리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