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한지숙 기자] 지은 지 30년이 넘는 오래된 대단지 아파트가 층간소음, 잦은 결로 등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장점도 있습니다.
가장 큰 장점은 동간 거리가 넓다는 것이지요. 지하주차장이 없다 보니 지상주차 공간을 두기 위해 앞, 뒤 동 사이가 크게 벌어져있습니다. 제한된 부지 위에 높이 올라가는 요즘 아파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장점입니다.
아파트 연수에 따라 나이테가 늘어 난 조경수도 큰 장점입니다. 고층까지 곧게 뻗은 나무가 너른 단지 곳곳에 배치돼 쾌적할 뿐 아니라 시각적으로도 시원한 풍광을 연출합니다. 폭포, 정자, 분수대 등 고층 아파트촌(村)의 아무리 빼어난 조경도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나무가 주는 편안한 휴식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재건축이 진행 중인 서울 강남구 개포지구에는 최고 5층인 아파트 동을 훌쩍 뛰어넘어 커버린 나무들이 빼곡합니다. 서울시에 따르면 개포동에 있는 나무는 1만그루가 넘습니다. 꽃나무뿐 아니라 플라터너스, 잣나무, 전나무 등 거목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나무들은 재건축 때 어떻게 될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타깝게도 상당수 나무들은 폐목 처리됩니다. 재건축 뒤 다시 심는 나무는 전체 조경수의 10% 안팎에 불과합니다.
결국 ‘돈’ 문제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 옮겨다가 다시 심는 비용이 새로운 나무를 사다 심는 비용 보다 훨씬 비싸기 때문이지요.
재건축 아파트 단지의 나무를 재활용하려면, 1차로 나무를 팠다가(굴지ㆍ掘栺) 운반해 임시 가식장에 옮겨 심어야(식지ㆍ植栺) 합니다. 아파트 공사기간 2~3년 동안 이 가식장에서 나무를 관리합니다. 아파트가 준공된 뒤에는 다시 2차 굴지, 운반, 아파트 현장에 식지 등의 절차를 밟습니다.
조경 시 직경 80~100㎝ 되는 거목은 보통 ‘포인트목’으로 쓰는 데 운반비용만 50만~100만원이 듭니다. 농작물이다 보니 공산품과 같은 규격이 없어, 가격은 현장 여건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재활용 식재는 보통 일이 아닙니다. 다시 이식한 뒤 살 확률인 ‘활착률’이 분명치 않습니다. 특히 나이가 30년 이상인 큰 나무들이 그렇습니다. 높이 자란 나무는 뿌리도 깊습니다. 굴지 때 뿌리가 상처받으면 새 흙에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뿌리 깊이 이상으로 흙을 충분히 떠내야 합니다. 30년 이상 된 개포지구의 거대목은 뿌리가 지하 3층까지 내려가기도 합니다.
재건축 이후 새 현장은 거목이 뿌리내리기 쉽지 않습니다. 바로 지하주차장 구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아파트 지하주차장은 지하 2, 3층에 동끼리 하나로 연결돼 있는 구조입니다. 거목이 뿌리내릴 땅이 모자랍니다. 지하구조물의 상부 땅 깊이(土深)는 2m 가량 됩니다. 여기에서 잘 자랄 수 있는 나무들만 조경수로 선택 받습니다.
이렇다 보니 거목은 요즘 인기가 없습니다. 또한 조경수도 유행을 탑니다.
김현 장원조경 팀장은 “옛 주공아파트들은 거대목으로 자라나는 플라터너스를 많이 심었는데, 지금은 전체 조경수의 0.1%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히말라야시다(개잎갈나무)도 예전엔 많이 심었지만, 바람이 불면 쓰러지는 일이 많아 지금은 비인기 수종”이라고 전합니다.
김 팀장은 또한 “일본은 분재가 발달해 작은 수종을 많이 심는데, 우리는 조경도 아파트간 경쟁 요소가 되니 보다 큰 것을 심게 된다. 유럽의 경우 하루에 한 그루를 공들여 심는데, 우리는 십수그루를 한꺼번에 심는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은 나무도 ‘경쟁 사회’인 모양입니다.
이런 까닭에 개포 2, 3단지에서 생명끈을 연장하게 된 나무는 수백 그루에 그칩니다. 이미 철거를 끝낸 2단지는 기존 수목 중 조경 가치가 있는 나무를 선별해 200그루만 재이식하기로 했습니다. 선택받은 이 나무들만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2018년 말 준공 때 재이식될 예정입니다. 일부는 학교에 기증됐다고 합니다.
상반기 중 철거되는 3단지는 두께 10~20㎝ 짜리 120여그루를 다시 심기로했습니다. 조합원이 원하면 가져가도록 해서 57그루가 새 주인을 찾았습니다. 조합은 서울시 ‘나무나눔공간(env.seoul.go.kr)’에도 잣나무, 목련, 측백나무, 홍단풍, 향나무, 전나무, 감나무 등 165그루를 내놨지만,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렇게 대량의 기증은 사이트 개설 이래 처음이었는데, 지난 1월 27일부터 2월 25일까지 분양 신청은 ‘0’건 입니다.
이에 따라 조합은 조합원에게 더 나눠 주기 위해 기증을 철회했습니다.
일반 분양 참여가 이렇게 저조한 것은 아파트 위주인 국내 주택 환경 여건 상 조경에 관심있는 인구가 적기 때문 입니다.
서울시와 자치구의 준비 미비도 한 몫 거듭니다. 서울시는 지난해 11월 대단지 아파트 단지는 재건축 때 조경수 처리 계획을 해당 구청에 제출하게 해 재활용을 유도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정유승 시 주택건축국장이 “소중한 수목 자원이 재건축 사업으로 인해 무관심하게 버려지는 일을 최소화하겠다”며 대규모 공원 조성 사업이나 학교 신축 정비 시에도 수목이 재활용될 수 있도록 홍보를 강화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공표처럼 잘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선 ‘나무나눔공간’ 사이트는 주요 포털에서 검색 때 노출이 되지 않고, 사이트 자체도 일반인이 이용하기 상당히 불편하게 설계돼 있습니다. 이는 일반 분양이 활성화되지 않는 데 일조합니다. 시 조경과 관계자는 “사이트 개편 작업이 진행 중으로, 6월 말에 새롭게 선보인다”며 “다른 자치구와 시도에도 기증 나무의 분양 안내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강남구청은 개포 재건축 단지 수목 현황과 재활용 계획 자료 요청에 “조합에 알아보라”는 답변을 합니다.
시와 구의 대응이 너무 늦고 안이해 아쉽습니다. 개포 3단지는 상반기 중 철거되는 데, 수목을 먼저 옮겨야만 수도관, 가스관, 정화조 등 땅 속에 매립돼 있는 지장물을 철거할 수 있습니다. 새 주인을 찾지 못한 잣나무, 목련, 측백나무, 홍단풍, 향나무, 전나무, 감나무는 이제 곧 폐목 처리될 것입니다.
사실 아파트의 조경수는 사유물이라서 버리든, 살리든 조합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공공재적 성격을 지녔다고 보는 것은 정 국장의 말대로 “소중한 수목 자원”이자, 대모산과 양재천 등 시내 산천과 어우러진 경관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지요. 양재로를 따라 걷거나 차량을 운전할 때 단지 주변에 높게 솟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마음의 여유를 가졌던 시민들은 폐목 초읽기에 들어간 이 나무들의 운명을 분명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jshan@heraldcorp.com
사진
개포 주공 3단지 - 개포 주공 3단지에 최고 5층 아파트 스카이라인을 뚫고 자라난 조경수들. 이상섭 기자/babtong@
개포 주공 1단지 - 개포 주공 1단지에 최고 5층 아파트 스카이라인을 뚫고 자라난 조경수들. 이상섭 기자/babtong@
개포 주공 2단지 - 수목 이식, 지장물 제거를 마치고 토지 정리 단계인 개포 주공 2단지 재건축 현장. 이상섭 기자/babt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