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용평가사 피치가 1일(현지시각) 미국 국가신용등급을 종전 ‘AAA’에서 ‘AA+’로 낮췄다. 최고 등급에서 바로 아래 등급으로 한 단계 강등한 것이다. 미국으로선 2011년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낮춘 데 이은 12년 만의 굴욕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유는 같다. 나랏빚이 과도하게 늘고 있고, 이를 놓고 정치권이 ‘벼랑 끝 대치’를 반복해 국가신뢰에 타격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부채는 2008년 금융위기 후, 그리고 2020년 코로나 팬데믹 후 뚜렷하게 늘어 올해 3월 말 기준 31조4584억달러(4경833조원)에 달한다. 피치는 국내총생산(GDP)에 견준 정부부채 규모가 올해 112.9%에서 2025년 118.4%로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 AAA 등급 국가들은 이 비율(중간값)이 39.3%, 바로 밑 AA 등급 국가도 44.7%인데 미국은 2.5배 이상 높다. GDP 대비 재정적자도 지난해 3.7%에서 올해 6.3%로 뛸 전망이다. 피치는 특히 “국가 채무 불이행 위험에도 정치권이 반복된 정치싸움으로 재정관리에 대한 신뢰를 갉아먹었다”고 꼬집었다.

2011년 S&P가 미 신용등급을 강등했을 땐 세계 금융시장에 큰 혼란이 벌어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충격이 채 잊히지 않은 데다 유로존 부채위기 등이 겹친 때라 일주일 새 미국 증시가 15%, 코스피는 17% 급락했다. 다행히 지금은 그때의 학습효과와 미 국채를 대체할 만한 안전자산이 아직은 없다는 현실적 이유로 신용 강등 여파가 비교적 제한적이다. 2일 미국 증시는 1~2%, 한국 등 아시아 증시도 2~3%대 약세를 보이는 선에서 마감했고 채권시장도 큰 타격이 없었다.

피치가 미국 신용 강등의 이유로 적시한 재정악화·나랏빚 증가·정치싸움은 우리도 겪고 있다는 점에서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의 나랏빚은 5년 새 400조원 넘게 불어 1000조원을 넘어섰다. 이에 따라 GDP 대비 국가 채무비율은 36%에서 49.4%로 급등했다. 국가채무와 재정적자를 적정 수준으로 억제하는 재정준칙 도입은 여야 정쟁으로 3년째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고령화로 재정적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글로벌 신용평가사들은 보고 있다.

미국은 기축통화국이어서 신용 강등 여파가 제한적이다. 하지만 소규모 개방경제국인 한국에 이런 일이 닥치면 일거에 외국 자본이 빠져나가고 원화가치가 급락하며 금융기관이 파산하는 등 나라 경제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재정은 최후의 보루’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초미의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