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수정 기자] “실랑이를 100번 해도 상관없어요. 터트릴 때가 오면 터트리세요”
“아~어떻하지”
상욕을 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당시 상황을 재연해보라는 김민정 연출의 주문에 젊은 여성은 머뭇머뭇 주저했다. 2분여간 침묵이 흐르고 감정이 고조되자 김 연출은 “뱉으세요”라고 툭 던졌다. 그러자 마치 주술에 걸린듯 이 여성은 “야~내가 먼저였잖아. 이 미친 X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딴 사람으로 돌변했다.
지난달 29일 오후 7시 30분 명동예술극장 지하 연습실에서는 아마추어 배우교실 6기생들의 연기 연습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20대부터 70대까지 커피숍 아르바이트생, 회사원, 의사, 주부, 초등학교 교사 등 다양한 직업과 연령대의 18명이 참가했다. 이들은 다음달 8일 명동예술극장에서 연극 ‘아워 타운’을 공연한다.
이날 연습 초반 아마추어 배우들은 연극 첫 장면인 마을 소개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했다. 극중 내레이터인 무대감독역의 이현정씨가 “지금 들어갈까요?”라고 묻자 김 연출은 “안 가르쳐줘요. ‘지금이구나’ 하고 본능적으로 움직이셔야 해요”라고 답했다.
대여섯번 동안 반복됐던 첫 장면 연습이 끝나고 김 연출은 중년 남녀 배우에게 즉흥 연기를 주문했다. 커피 대신 녹차를 마시라고 강요하는 안주인과 회장님이 큰소리로 말다툼하는 장면이다.
이어 젊은 여성에게는 상욕을 했던 상황을 재연해보라고 했다. 처음에는 쑥스러운 듯 큰소리를 내지 못했던 배우들은 같은 대사를 반복할수록 전문 배우 뺨치는 연기력을 선보였다.
“즉흥 연기를 하는 이유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일상을 살다보면 나에게 익숙한 감정만 사용하지만 무대에서는 감정의 범위를 넓혀야해요. 익숙한 나는 문 밖에 두고 오세요. 익숙한 나를 고집하면 나에게서 다른 모습을 하나도 못 만나요”
5분간 짧은 휴식 뒤에도 즉흥 연기는 이어졌다. 이번에는 허영숙(62)씨가 앞으로 나와 결혼식 때의 기억을 풀어냈다.
“제 결혼식은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날 예쁘게 보이지 않을까봐 얼마나 초조했는지요. 엄마는 제 짐을 싸면서 한없이 우셨죠. 엄마가 그렇게 우는 게 한편으로는 짜증이 나기도 했어요”
김 연출은 연극 ‘아워 타운’에서 뼈대만 가져오고 극중 에피소드는 아마추어 배우들의 실제 이야기로 채울 계획이다. 첫사랑, 결혼, 죽음, 잠깐만(죽었다가 잠깐 살아 돌아간 순간), 우리에게 남은 시간 등 5개 테마로 이뤄진다.
“배우는 숨을 곳이 없어요. 여러분은 도망칠 곳이 없어요. ‘나는 갈 곳이 없다’를 매일 복창하세요”(김 연출)
아마추어 배우들은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저녁에 낯선 이들 앞에서 고함을 지르고, 울며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내야한다. 이같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배우교실이 “개그콘서트보다 재미있다”고 말했다. 대사를 잊어버려 연습이 끊겨도 웃음소리가 이어졌고, 휴식 시간에도 삼삼오오 모여서 춤 연습을 했다.
관객 앞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는 것이 배우지만 김 연출은 “먼저 자신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으라”고 강조했다.
한국은행에 다니는 민효식(32)씨는 “‘연기는 절반의 부끄러움과 절반의 영광’이라던데 집에 가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을 정도로 부끄럽다”면서도 “평소에는 항상 멋있게 보이려고 하고 주변을 의식하지만 배우교실에서 연출이 시키는 대로 하다보니 내 자신의 틀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현대카드 신입사원인 김도현(30)씨도 “그동안 취업준비를 하면서 영어 등 자기개발에 매진하고, 감정은 안으로 삭이면서 사는게 습관이 되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몰랐던 거 같다”며 “배우교실은 내 안에 뭐가 있는지 발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추어 배우들의 가족들은 “그런 거 할 시간에 기술 자격증이나 따라”고 핀잔을 주거나 “다음날 출근하려면 힘들지 않느냐”고 걱정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6대1의 경쟁률을 뚫고 이 자리에 온 아마추어 배우들은 밤 10시 연습이 끝나고 다시 회사에 돌아갈지언정 결석이나 지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민씨는 “공연 당일 야근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며 “연습이 없는 날에는 틈틈이 야근을 해둔다”고 전했다.
명동예술극장이 자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앞서 1~5기 아마추어 배우교실 참가자들의 만족도는 100%에 달한다. 아마추어 배우교실 3기에 참여했던 이원호씨는 연기의 매력에 빠져 전문 배우가 되기도 했다.
명동예술극장 아마추어 배우교실은 지난 2010년 일반 시민들에게 연극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무대에 한번도 오른 적이 없는 순수 아마추어들을 대상으로 참가자를 선발한다.
두달여간의 연습이 끝나면 이들은 가족, 친구들을 관객으로 불러놓고 공연을 한다. 과거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던 소품, 의상 등이 그대로 사용된다.
비록 어설픈 연기지만 직장 생활과 연기 연습을 병행하며 고생했을 배우들의 열정에 감동을 받아 눈물을 쏟는 관객들이 많다고 명동극장 관계자들은 귀뜸했다.
김 연출은 “18명의 아마추어 배우들은 테크닉이 없는 ‘진짜’라 연습 과정이 힘들지 않고 재미있다”며 “공연의 결과는 이같은 과정을 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