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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꾸고 싶은 세상…정도전을 불러내다
혼탁한 정치권 등 고려말 닮은 현실
“대중문화 이어 출판계도 관련책 봇물

김탁환 ‘혁명’ 정도전 번민 집중조명
“사회안정 염원한 대중이 원한 혁명가”
‘역사적 그순간’ 설득력있는 시각 주목


혁명/ 김탁환 지음/ 민음사
물 1g의 온도를 섭씨 1도 올리려면 1㎈의 열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0도의 얼음을 같은 온도의 물로 변화시키기 위한 융해열은 80㎈에 달한다. 즉 1g의 얼음을 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열량은 같은 양의 물의 온도를 무려 80도나 올릴 수 있는 열량과 같다.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변화들은 얼음이 물로 변화하는 과정과 많이 닮아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처럼 보여도 밑바닥을 살펴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변화를 위해 뿌려진 밑밥이 적지 않게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배경만 들여다보아도 소수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구체제(앙시앙 레짐)의 오랜 모순,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 따른 국가재정 파탄, 계몽사상의 확산 등 수도 없이 깔린 밑밥을 발견할 수 있다.

최근 들어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정도전(1342~1398)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관심은 대중문화와 출판계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는 정도전을 다룬 작품들의 수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지난 16일에 방영된 KBS 1TV 대하드라마 ‘정도전’ 16회는 15.2%(닐슨코리아 전국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MBC와 SBS 경쟁작들을 제치고 동시간대 1위에 올랐다. 올해 들어 출간된 정도전과 관련된 책만 해도 김탁환 작가의 장편소설 ‘혁명(전 2권ㆍ민음사)’를 비롯해 ‘정도전과 그의 시대(옥당)’, ‘정도전과 조선건국사(이북이십사)’, 이재운 작가의 장편소설 ‘정도전(책이있는마을)’, 김용상 작가의 장편소설 ‘정도전(고즈넉)’ 등 다섯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 1997년 정도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정도전을 위한 변명(휴머니스트 펴냄)’과 임종일 작가의 장편소설 ‘정도전(인문서원)’도 올해 들어 재출간됐다.

그중에서도 김탁환 작가의 ‘혁명’은 연대기적인 서술로 당대와 인물을 설명하고 묘사하는 기존의 역사소설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서술 방식으로 정도전의 내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다. 지난 17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와 만난 저자는 정도전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 이유로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과 고려 말의 혼란기의 유사성을 들었다.

“고려 말은 거듭된 실정(失政)과 외침, 땅 하나에 지주가 일곱 여덟 명에 달하는 등 극심한 조세부담으로 백성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 역시 극심한 빈부 격차와 정치적인 혼란으로 서민들의 생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는 점에서 고려 말과 유사합니다. 또한 원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고민하던 고려 말의 모습 또한 현재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 사이에 끼인 대한민국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정도전은 근본적인 시스템을 바꿈으로써 당대의 혼란을 가장 슬기롭게 풀어낸 인물입니다. 사회적 안정을 염원하는 대중의 심리가 자연스럽게 정도전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는 고려 말 혼란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배층의 극단적인 사익 추구를 들었다. 항몽전쟁 이후 사실상 원나라 황실이 고려의 왕좌를 좌지우지하다 보니 왕들 역시 왕좌에 있을 때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만 급급했고, 이 같은 태도가 전 지배층으로 확산됐다는 것이다. 공익을 강조하는 저자의 목소리에선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혁명은 혁명이 아니다. 출세욕이며 찬탈이다”(58쪽)라던 소설 속 정도전의 독백이 겹쳐졌다.

“심지어 왕이 시장에 상점을 차려 폭리를 취해 신하들이 보다 못해 만류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습니다. 언제 쫓겨날 왕좌일지 모르니 자리에 있을 때 뽑아 먹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했습니다. 천민자본주의가 심화된 요즘과 놀랍도록 유사했던 시대입니다. 정도전은 왕의 자리에 어느 누가 올라도 국가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는 견고한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공적인 영역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현 정부는 ‘창조’를, 야권의 안철수 의원은 ‘새 정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정치인들의 목소리에 결코 사익이 우선되지 않아야 올바른 변화와 쇄신이 가능합니다.”

이 작품은 이성계가 황해도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1392년 3월 17일)부터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암살당하는 순간(1392년 4월 4일)까지 18일간의 기록을 다양한 형태의 문체로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역사서를 연상케 하는 편년체 서술로 내용이 전개되다가도 일기, 편지에 야담을 방불케하는 이야기로 정도전의 번민을 마치 모노드라마처럼 그려내 흡인력을 높였다. 또한 정몽주를 조선의 또 다른 설계자인 것처럼 서술한 것도 흥미롭다.

[사진제공=KBS]

“공교롭게도 위화도 회군, 정몽주의 암살 등 중요한 역사적 순간에 정도전이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삼봉집’ ‘포은집’ 등 현존하는 문집들을 살펴보면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함께 개혁을 추진했고, 또 정도전의 정책 상당수는 정몽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만들어진 것들 입니다. 조선 개국에 있어서 3인의 지분은 동일하다고 봅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이성계의 낙마가 없었다면 이방원도 발호하지 않았을 것이고 정몽주 또한 그런 죽음을 맞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낙마 이후 18일의 기간이 실은 역사의 운명을 가른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비어 있는 역사를 다른 문헌을 근거로 재조합해 설득력 있게 펼치는 것은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고요.”

이 작품은 저자가 조선왕조 500년을 소설로 재구성하는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첫 작품이다. 그는 지난 90년대 말부터 ‘불멸의 이순신’ ‘열녀문의 비밀’ 등 조선을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13종 35권을 선보인 바 있다. 그는 “앞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한 소설 10여종을 새로 선보이고, 기존의 작품을 개작해 총 60여권을 완성할 계획”이라며 “정도전은 하루하루를 혁명 같이 꽉 차게 살아감으로써 쾌락을 느꼈던 인물로 느껴진다. 앞으로 그런 자세로 집필에 임할 것”이라고 각오를 전했다.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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