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도자기 등 옛 물건들을 통해 흘러간 시간 헤아리며 의미 되새겨
‘사경’부터 ‘춘향노래’까지 100여편 담아 전통적 가치에 바치는 뜨거운 헌사
“하늘을 못 보면/땅을 보면 되지/땅이 안 보이면/사람을 보면 되지/그래 가슴 속에 있는 거/훔쳐 보면 되지/하늘까지도 훔쳐 보면 되지.”(김병연-노루목)
옛사람과 오래된 물건들이 노시인의 시어를 통해 책장마다 여백 위에서 보이지 않는 수묵화로 되살아난다. 보이지도 않는 그림에서 감도는 그윽한 묵향은 시어의 공감각적 전이가 불러온 착각만은 아닐 터이다. 한국 시단의 터줏대감 이근배(74·사진) 시인의 9년 만의 시집 ‘추사를 훔치다’(문학수첩)는 그림 없는 화첩이다.
이 시인은 지난 1960년대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에서 시ㆍ시조ㆍ동시 등으로 6번에 걸쳐 당선되며 신화처럼 등단했다. 이후 반세기를 넘기는 시력(詩歷)을 이어온 그는 현란한 표현과 비유 대신 현실을 압축하면서도 서정미을 솎아낸 시어로 우리 고유의 정서를 표현하는데 진력해왔다. 세월에 무뎌지지 않은 시심은 “이 땅의 산과 물이, 역사가, 사람이……, 참으로 귀신스러운 조상들의 솜씨가 빚어낸 글씨, 그림, 청자, 백자, 벼루……, 같은 것들이 내 꿈자리 어지럽히고 귓속말로 내 혼을 꼬여내지만 나는 그에 값할 말을 찾을 길이 없었다”는 시집의 서문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 시집엔 ‘사경(寫經)’으로 시작해 ‘몽룡이가 부르는 춘향노래’까지 100여 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인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되살려 묵필을 닮은 시어로 온갖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를 그려낸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장에서 시인이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어려움을 겪은 유년 시절과 6ㆍ25 등 현대사를 추억하고, 벼루와 도자기 등 옛 물건들을 통해 아프게 혹은 벅차게 흘러간 시간들을 헤아리며 그 의미를 되돌아본다. “여러 해 징역살이를 한 애비를 둔 나는/당신이 다른 생각을 가졌었다고/오히려 돌팔매와 가난의 족쇄를/물려받아야 했었다”(폐족)란 시구에선 시인이 헤쳐 온 현대사의 격랑을, “저 계림을 높이 들어 올린 신라대의/공부가 넓고 크신 이들의/붓의 신령이 스며 있는 것일까?/내 무딘 손끝에 핏발을 세워주는”(신라토기 벼루에 대한 생각)이란 시구에선 과거를 현재에 새롭게 되새기고자 하는 시인의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 같은 예술세계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장에서 구체화 된다. 시인은 옛 선비와 고승들을 그들과 밀접한 공간과 엮어 현재로 소환한다. 소환된 옛사람들은 특정 시점에 못 박히지 않고 시공을 허물며 희미해져 가는 정신적 유산을 향해 불을 밝힌다. 의상대사는 의상대에 올라 “법을 아느냐/만법이 하나임을 아느냐/모습은 비어 있어도 차 있고/가득 차 있음이 또한 비어 있는 것”(의상-의상대)이라며 불법을 설파한다. 도산서원에 머물며 조정의 거듭된 출사 요청을 거절하는 퇴계 이황의 모습은 “이윽고 높은 다락에서 들려오는 나라 큰 스승의 기침소리/(……)/물러들 가라/물러들 가라”(이황-도산서원)와 같은 일갈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마지막 장인 다섯 번째 장은 피안의 공간이다. 시공간을 다시 현재로 되돌려 연착륙시킨 시인은 인사동 시장에서 “그릇은 백년 넘어야/품목에도 오르는데/사람은 멱이 차면/재활용품도 못 되는 것/흰머리 먹칠을 해도/사랑아웃 팔리지 않는”(자매)이라고 갈수록 가치를 더해가는 옛 물건과 유한한 인생을 비교하며 한탄한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인생을 위로하고 아름답게 보이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라고 고백한다. 사설(辭說)을 닮은 마지막 시 ‘몽룡이가 부르는 춘향 노래’ 속의 판소리 마당 한복판으로 뛰어든 시인은 “물렀거라 물렀거라 내 사랑 니 알고 니 사랑 내 아느니, 이승 저승 멀다해도 꿈에 만나 어화둥둥 얼싸 안고 놀자꾸나”라고 외치며 신명을 일궈낸다.
이쯤 되면 시집의 첫 번째 장에 실린 시 ‘사랑세쪽’으로 되돌아가 “말더듬이가 되고 싶어요/어머니/사랑 앞에서는/더더욱,”이란 시구 위에 도돌이표를 찍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사랑세쪽’보다 열서너 장 남짓 거슬러 올라간 페이지에 실린 ‘혹애(惑愛)’의 시구는 ‘지독한 사랑’이란 의미를 가진 제목처럼 시인의 사랑 고백의 절정이다. “사랑하는 거/하나쯤은 있어야 사람이지/사람, 아니면/책이나 그림 따위 아무 거라도/목숨보다 아낄 줄 아는 게/사랑이지.”
정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