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하차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2명의 주ㆍ조연 배우가 줄줄이 하차했고, 설설희로 출연했던 서하준은 갑자기 혈액암에 걸렸다. “암세포도 생명”이라는 대사를 남길 때 방송가에선 ‘설설희 하차설’이 심심치 않게 돌았다. 중도 투입돼 조연으로 시작했던 서하준은 결국 남주인공 자리까지 꿰찼다. ‘임성한 총애설’이 돈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MBC 일일드라마 ‘오로라공주’를 끝낸 신인배우 서하준(25)을 최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이제 와서 얘기지만, 저도 궁금해요. 3차 오디션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연락이 없었어요. 방송이 10회 정도 나간 뒤 작은 비중으로 출연하라는 전화가 왔죠. 여주인공 오로라를 보필하는 역이라고만 알고 출연했는데, 비중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어요. 작가님께서 저를 예쁘게 봐주셨다면 감사하지만 지금도 제가 주인공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외모와 태도, 성품까지 근사했던 설설희는 극중 배우였던 오로라(정소민 분)의 매니저로 출발해 남주인공과 사랑의 라이벌이 됐다가, 오로라의 남편으로 드라마를 끝냈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황마마(오창석 분)와 오로라의 멜로로 시작했고 결말이 달라지긴 했지만, 설설희가 두 사람을 받쳐주고 빛내주는 조연의 위치라는 건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논란이 많았던 드라마는 출연배우에게도 극비리에 스토리가 전달됐기에 서하준은 대본을 기다리는 내내 “연애소설을 기다리는 독자의 마음이었다”고 한다. 서하준으로 시작된 논란도 적지 않았다.
“ ‘암세포도 생명’이라는 대사가 파장이 오리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어요. 하지만 연기자가 작품을 대할 때는, 대본에 적힌 글로 먼저 보게 돼요. 시각으로 숙지해 분위기로 만들어 전달해야 하죠. 논란이나 뒷말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스스로 납득하고 이해한 뒤 최대한 분위기를 살려 작품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드라마를 마치고 나니 서하준은 논란과 무관하게 매력적인 캐릭터를 그려준 임성한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얼굴 한 번 본 적은 없지만, 임 작가는 촬영 중간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와 캐릭터 표현방법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서하준으로선 당연히 “임 작가님께는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해도 부족하다”며 “다시 연기를 할 수 있게 길을 열어준 은인이고, 설설희로 서하준을 알릴 수 있게 해준 분”이라는 생각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뮤지컬 ‘라이온킹’을 본 뒤 배우를 꿈꿨던 서하준은 다음날로 입시학원에 등록해 대학에 진학했다가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대학로로 발길을 돌렸다. 연극무대에서 기본기를 닦아보자는 생각이었다. TV나 스크린의 연기는 대학로에서 인정받은 뒤 도전할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그곳 생활도 힘에 부쳤다고 한다. “멋도 모르고 무대에 올라갔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삶으로 자유롭게 사는 배우의 매력에 푹 빠졌던 때”였다. 연기가 너무 하고 싶은데 기회는 없었고, 그러던 차에 ‘오로라공주’를 통해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은 드라마 한 편 덕에 영화(바다가 부른다) 촬영도 마쳤고, 예능(정글의 법칙) 출연도 결정됐다.
“첫 작품이지만 아쉬움은 없어요. 배우는 대중에게 희로애락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작품 안에서 어느 정도 펼쳐보였던 것 같아요. ‘오로라공주’는 제가 앞으로 나아갈 길 중에 하나를 보여줬어요. 길을 가다 비가 오기도 했고, 발도 삐끗한 적이 있지만 정상에 힘들게 올라왔어요. 제 롤모델이 모건 프리먼이에요. 어떤 배역을 맡아도 그 사람의 삶으로 녹여낼 수 있는 배우요. 이제는 설설희가 아닌 서하준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