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자신의 고통을 숨기는 것은 무리지어 사는 짐승들의 본능이다. 고통을 드러내는 순간 그 짐승은 무리로부터 도태된다.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운 작고 약한 짐승일수록 고통을 숨기는 것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고통을 숨기고 그 고통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싱어송라이터 야야(夜夜)의 정규 2집 ‘잔혹영화(殘酷映畵)’는 처음엔 낯설음으로 청자를 당황케 하다가 이내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매혹시킨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한커풀 벗겨내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홀로 내몰려 괴롭게 헐떡거리는 짐승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앨범의 밑바닥에 도사린 외로움과 슬픔은 지독히 깊다. 야야와의 만남은 기자의 독해가 올바른 것이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야야를 지난 16일 서울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야야는 “앨범에 ‘잔혹영화’라는 타이틀을 달은 이유는 내 의도와 상관없이 경험했던 고통스러운 순간에 대한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라며 “쉽게 상처를 받는 성격이지만 감정 표현을 잘못하기 때문에, 내 안의 억눌렸던 감정들을 음악으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앨범 발매 소감을 밝혔다.
이 앨범은 외형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국내에선 좀처럼 보기 드문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앨범엔 옴니버스 영화 콘셉트에 따라 13곡이 6개의 장르(컬트ㆍ느와르ㆍ드라마ㆍ에로틱ㆍ판타지ㆍ사티어)로 분류돼 실려 있다. 러닝타임은 무려 1시간을 넘길 뿐만 아니라, 영화 스틸 컷을 연상케 하는 사진과 시놉시스를 담은 앨범 속지의 양도 70여 페이지에 달한다. 록을 비롯해 사이키델릭ㆍ클래식ㆍ재즈ㆍ일렉트로닉ㆍ트립합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적 요소가 곡들에 혼재돼 있어 특정 음악의 계보에 분류하는 일도 불가능하다. 야야는 수록곡 전곡의 작사ㆍ작곡ㆍ편곡 및 프로듀싱까지 도맡아 앨범 제작 전반을 지휘했다. 야야는 “원래 미술을 했었고 또 음악과 미술은 별개의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음악을 들으며 시각적 효과를 함께 느낄 수 있길 바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 음악은 월드뮤직ㆍ록ㆍ재즈ㆍ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다”며 “홍대 신에서 활동하면서 어디에도 소외된 감이 없지 않지만 이 같은 음악적 특징은 개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웅장한 스트링 편곡과 다양한 효과음의 조화가 돋보이는 첫 번째 트랙 ‘살인자의 노래’와 일렉트로닉 트립합(Trip-hop) 비트 위에 더해진 블루지한 기타 사운드가 인상적인 두 번째 트랙 ‘트루스(Truth)’는 각각 6분과 9분이란 파격적인 길이와 극적인 구성으로 시작부터 청자를 압도한다. 하드록 이상의 강한 사운드를 들려주는 ‘파괴자’ㆍ‘악몽’부터 유쾌한 척 하면서도 서슬을 거두지 않는 ‘묘기술’ㆍ‘붉은 마녀’까지 앨범은 몰개성을 저주라도 하듯 매 곡마다 정형화된 색깔을 거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곡들은 저마다 멜로디의 처연한 정서를 유지함과 동시에 왕따ㆍ학원폭력ㆍ차별 등 야야의 과거 경험들을 적나라하게 고백한 시놉시스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콘셉트에서 벗어나지 않는 영리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앨범은 내면의 상처를 어루만지기보다 후벼 파는 듯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독특한 체험을 하게 만든다. 이 같은 앨범의 정서는 강신무의 살풀이와도 닮아있다.
야야는 “누구나 자신에게 불행이 닥치기 전까지는 그 상황이 자신에게 닥칠 것이란 사실을 믿지 않는다”며 “힘내라는 말만큼 진정으로 힘든 사람에게 무의미한 말은 없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외롭고 힘들어 울고 싶을 때 같이 울어주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위로다운 위로라고 생각한다”며 “처음엔 이 앨범이 낯설 수도 있겠지만 마음을 조금만 연다면 그 어떤 ‘힐링’을 표방한 음악 이상으로 위로가 돼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야야는 독특한 음악은 논란의 중심에 서곤 했다. 야야는 지난 2010년 EBS ‘스페이스공감’의 ‘헬로루키’ 대상을 거머쥐며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지난해 KBS 2TV 밴드 서바이벌 ‘톱밴드2’에선 심사위원 간에 첨예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음악을 두고 평단이 이토록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또한 야야는 ‘톱밴드2’의 심사위원 폄하논란으로 상당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야야는 “당시 ‘톱밴드2’ 제작진의 유도 질문에 순진하게 걸려 들어간 부분도 있고, 본의와 다르게 방송이 편집돼 나간 부분도 있다”며 “무엇보다도 방송으로 인해 기존에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음악과 내 노력까지 폄하되는 현실이 견디기 어려웠다”고 고백했다. 이어 그는 “다행스러운 부분이라면 방송 이후 많은 뮤지션들이 내 음악에 관심을 가져주기 시작했다”며 “그들로부터 격려와 호평을 받을 수 있었기에 조금은 위로가 됐다”고 털어놓았다.
이번 앨범엔 정상급 뮤지션들이 대거 세션으로 참여해 제작을 도왔다. 기타리스트 신윤철을 비롯해 크라잉넛의 김인수,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킹스턴루디스카의 색소포니스트 성낙원, 포스트패닉의 켄 등이 힘을 보탰다.
야야는 “‘트루스’는 신윤철의 기타 톤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라 조심스럽게 데모를 보내 부탁을 드렸는데 흔쾌히 허락해줘 고마웠다”며 “크라잉넛의 김인수는 앨범을 듣고 이번에 제대로 ‘또라이’ 하나가 탄생한 것 같은데 그게 너라서 기쁘다고 말해줘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야야는 오는 29일 서울 홍대 클럽 벨로주에서 단독 공연을 펼친다. 야야는 “스트링 콰르텟(현악 4중주)와 재즈 피아노, 일렉트릭 콘트라베이스 등 다양한 악기를 편성해 다채로운 무대를 꾸밀 예정”이라며 “기회가 된다면 김기덕ㆍ김지운 감독 영화의 음악을 꼭 맡아보고 싶고, 직접 연기도 해보고 싶다”고 바람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