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철은 “지난 1987년에 발매한 첫 국악음반 ‘영의 세계’는 고작 몇백 장밖에 판매되지 않아 음반사로부터 절판 당하고 남은 물량이 모두 폐기처분됐다”며 “영화 ‘서편제’ OST를 제외한 ‘황천길’ ‘불림소리’ ‘팔만대장경’ 등 모든 국악음반이 대중적으로는 철저히 실패했다”고 고백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김수철의 국악음반 상당수는 마니아들의 ‘레어 아이템(Rare Itemㆍ희귀품목)’이었다. 그러나 음악 시장이 음원 중심으로 개편된 최근엔 온라인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레어 아이템’이 많아졌다. 폐기처분됐던 음반 ‘영의 세계’도 음원사이트에서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구매가 가능하다. 현재 김수철의 주요 국악음반 음원이 음원사이트에서 서비스 중이다. 이제 16년 전 기자처럼 시골 음반가게를 뒤져 먼지를 뒤집어쓴 LP를 구하지 않아도 되는 편리한 세상이다.
‘서편제’ OST를 제외하고 초심자에게 가장 추천할 만한 음반은 1989년 작 ‘황천길’이다. 태평소 연주곡 ‘황천길’을 비롯해 아쟁 연주곡 ‘한(恨)’, 대금 연주곡 ‘나그네’, 피리 연주곡 ‘외길’, 1986년 아시안게임 전야제 음악 ‘풍물’ 등 국악 크로스오버의 절정을 들려주는 곡들로 다채로운 음반이다. 국악이 낯선 사람들도 ‘한’이 들려주는 아쟁의 처연한 선율과 큰 진폭을 가진 울림 앞에서 끝끝내 마음에 빗장을 걸어놓긴 쉽지 않을 것이다. 슬픔을 점증시키다 흥으로 풀어내는 듯한 곡들의 배치 순서 역시 절묘하다. 김수철은 “이 앨범 제작 때문에 진 빚을 같은 해에 발표한 솔로 7집 ‘원맨밴드(One Man Band)’의 수록곡 ‘정신차려’의 히트로 갚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1997년에 발표된 ‘불림소리’ 두 번째 음반은 가장 대중음악에 가까운 뉴에이지 국악을 들려주는 작품이다. 이 음반은 인간이 유혹, 좌절, 인내를 거쳐 마침내 신을 만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헤비메탈과 국악을 크로스오버한 첫 트랙 ‘야상(惹想)’의 긴장감 넘치는 연주는 단연 이 음반의 압권이다.
1998년 작 ‘팔만대장경’은 지난 1995년 12월 유네스코가 팔만대장경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자 해인사 내 고려대장경연구소의 의뢰로 제작된 음반으로 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한다. ‘다가오는 검은 구름’ ‘전장(戰場)에서’ ‘구천(九天)으로 가는 길’ ‘천상(天上)의 문(門)에서’ 등 4악장으로 구성된 이 음반은 동서양의 악기 소리를 한데 아우르며 한국적인 선율을 담아 전 세계적인 보편성 획득에 도전하고 있다. 김수철은 “곡을 의뢰받은 뒤 팔만대장경을 직접 보자 경건한 마음이 들어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기 위해 술과 담배를 끊고 작업에 임했다”고 전했다.
2002년에 공개된 ‘기타 산조’는 우리 전통 기악독주곡 형태 중 하나인 산조(散調)를 서양 악기인 전기기타로 연주한 음악을 담은 음반이다. 음반엔 김수철이 장고ㆍ대금ㆍ가야금과 함께 연주하는 ‘기타산조’를 비롯해 2002 한ㆍ일 월드컵 조추첨, 개막식 음악 등이 담겨 있다.
정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