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록밴드 크라잉넛은 음악 그 자체의 즐거움을 몸으로 증명해줬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대중음악사적 의의를 갖는다. 서울 동부이촌동에서 함께 나고 자란 동네 친구들로 구성된 이들이 지난 1996년에 내놓은 곡 ‘말달리자’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한국 인디 음악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 컴필레이션 앨범 ‘아워 네이션(Our Nation)’ 1집에 실린 ‘말달리자’는 대중에게 가창력과 연주력이 음악의 전부가 아님을 일깨워주며 인디씬의 시작을 알렸다. IMF 한파로 몸과 마음이 얼어붙은 청춘들은 ‘말달리자’의 후렴구 “닥쳐 닥쳐 닥치고 내 말 들어”와 밑도 끝도 없는 가사에 열광했다. 그렇게 ‘말달리자’는 청춘의 송가로 자리 잡았다.
높아진 인기와 상관없이 크라잉넛의 행보는 한결 같았다. 이들은 꾸준히 앨범을 냈고 클럽에서 공연을 했으며 술도 많이 마시고 밥도 많이 먹었다. 그리고 여전히 서로 시답지 않은 얘기를 나누며 낄낄거리고 있다. 4년 만에 7집 ‘플레이밍 넛츠(Flaming Nuts)’를 발표한 크라잉넛의 멤버 박윤식(보컬) 이상면(기타) 한경록(베이스) 이상혁(드럼) 김인수(키보드)를 13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나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경록은 “앨범만 내지 않았을 뿐 결성 15주년 기념 공연, 미국 음악 페스티벌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 참여 등으로 계속 바빴다”며 “한 호흡 쉬었더니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들이 솟아올랐고 자연스럽게 앨범 발매로 이어졌다”고 소감을 밝혔다.
앨범은 재킷부터 즐겁다. 크라잉넛과 오래전부터 친분을 맺어온 만화가 강도하가 선물해준 재킷 아트워크 속엔 할리우드 영화에서 악역을 도맡아온 배우 대니 트레조의 모습이 새빨간 배경 위에 땅콩으로 형상화 돼 있다. ‘플레이밍 넛츠(불타는 땅콩)’란 타이틀이 절로 떠오르는 아트워크다. 속지엔 크라잉넛의 상징인 해적 이미지가 곳곳에 담겨있어 웃음을 준다.
앨범에 실린 10곡은 그야말로 하이브리드(Hybrid)다. 힙합비트로 시작하는 타이틀곡 ‘기브 미 더 머니(Give Me The Money)’엔 “참아 내야해 노력 해야 해 근면 해야되 성실 해야되” 등 라임(운율)을 살린 랩에 가까운 가사에 뜬금없이 우쿨렐레 연주까지 등장한다. 여기에 몽환적인 연주로 우주의 탄생 설화를 그려냈다는 ‘미지의 세계’, 일상의 우울을 시적인 가사로 위무하는 ‘5분 세탁’, 모터헤드(Motorhead)의 대표곡 ‘에이스 오브 스페이즈(Ace of Spades)’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연주와 보컬을 들려주는 밴드송 ‘땅콩’까지 이만하면 이종격투기 수준이다.
이상면은 “10곡에 10가지 장르를 담아냈기 때문에 장르 구분은 의미 없다”며 “수록곡에 특별히 공통된 주제의식은 없지만 일상의 소소함을 담아내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한경록은 “서로 다른 주제를 가진 곡들이어도 앨범에 모이면 힘이 붙고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진다”며 “음반 시장이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우리가 정규 앨범 발매를 고집하는 이유는 앨범 그 자체의 힘을 믿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크라잉넛은 이번 앨범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으로 100% 자체 녹음을 꼽았다. 이상면은 “녹음과 믹싱을 모두 우리의 보금자리인 ‘토바다 스튜디오’에서 엔지니어 없이 직접 해결했다”며 “비용도 적게 들지만 무엇보다도 그것이 인디 정신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상혁은 ”독학으로 모든 과정을 공부하고 모든 장비를 직접 조금씩 사들였다”며 “인디를 표방하면서 외국에서 많은 돈을 들여 믹싱과 마스터링을 진행했다고 자랑하는 것은 오히려 창피한 일 아니냐고”고 반문했다. 사실상 인디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정도로 때깔 좋은 앨범들이 쏟아지는 현실 속에서 크라잉넛의 일침은 많은 점을 시사했다.
크라잉넛은 지난해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 페스티벌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박윤식은 “경쟁대신 음악 그 자체를 즐기는 문화가 좋아보였다”며 “서로의 언어는 달라도 로큰롤의 정서는 언어를 뛰어넘어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이상혁은 “내로라하는 밴드들이 모두 모이는 페스티벌에서 현지인들이 우리의 음악에 열광하는 모습이 놀라웠다”며 “우리의 음악에 대한 가능성을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고 덧붙였다.
크라잉넛은 한국 밴드에선 보기 드물게 멤버 교체 없이 끈끈한 팀워크를 유지해왔다. 장수 비결을 묻자 이들은 초심을 꼽았다. 한경록은 ”음악은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인데 즐거움보다 인기에 집중하면 밴드는 흔들리게 된다”며 “즐거움과 인기가 주객전도되면 안 된다”고 답했다. 이상혁은 “인기를 얻으면 방송에 집중하고 클럽 공연을 소홀히 하는 밴드들이 많다”며 “우리는 태어난 곳을 잊지 않으려고 꾸준히 클럽 공연을 하고 있다. 클럽 공연을 잊으면 팬들도 그 밴드를 잊게 된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앨범 속지 첫 페이지엔 영국 출신 전설적인 록밴드 롤링스톤스(The Rolling Stones)의 결성 50주년 기념 베스트앨범 ‘그르르!(GRRR!)’를 패러디한 이미지가 그려져 있다. 크라잉넛은 “롤링스톤스처럼 오랫동안 밴드를 하고 싶다”며 “대단한 인기는 필요 없다. 가늘고 길게 그리고 즐겁게 활동을 이어나갈 수 있길 희망한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크라잉넛은 오는 15일 서울 롯데카드아트센터 아트홀 공연을 시작으로 21일 대구(복합문화공간 인디야), 22일 부산(오즈홀)에서 공연을 이어갈 예정이다. 크라잉넛은 “7월엔 대전에서 열리는 호락호락페스티벌, 8월엔 지산월드록페스티벌과 부산국제록페스티벌에 참여한다”며 “9월 이후엔 일본 투어도 진행할 계획이니 많은 응원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