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참맛…예술이 된 세계 최대 꼬방동네
6·25전쟁때 피란민 들끓던 판자촌 어묵공장·어촌만 자리 잡았던 영도 생계 때문에 만들어진 자갈치시장 부산을…대한민국을 지탱하던 곳
어둠속에서 출발했지만 희망을 키운 1세대들 ‘행복한 눈물의 짠맛’ 느끼다
요즘 부산에선 초량 감천 등 원도심과 해운대(신도심)가 함께 뜬다. 서울로 치면 꼬방동네와 강남번화가, 대척점 관계인데, 흥미롭다. 부산의 원도심이 없었다면 해운대도 없었고, 부산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없었다.
6.25전쟁 당시 불과 몇주만에 우리는 낙동강 전선 이남으로 갇히는 신세가 된다. 낙동강 전선에서 한국군과 21개국 군인들이 피흘리는 동안, ‘초미니 대한민국’은 부산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이게 된다. 그때 주무대는 영도, 남포동, 초량동과 감천, 우암마을이었다.
감천 달동네, 우암 소막사 등 부산 시내 곳곳에 마련된 40여개 수용소에는 피란민들로 들끓었다. 막사 내부를 가마니, 이불 등으로 공간을 구분해 살거나, 산 등성이를 깎은 뒤 판자로 규격화된 거주지를 만들었다. 수도, 화장실 등 기본 주거환경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니, 생필품 부족, 질병, 화재 등으로 고단하고 힘든 삶을 보냈다. 대한민국의 끝을 잡고 재기해 보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래서 감천 우암 초량은 대한민국을 다시 세운 곳이다.
내륙의 남포동과 섬인 영도는 마주보고 있다. 영도는 해방무렵 세워진 동광 어묵공장과 어촌만 형성돼 있을 뿐 그리 번화하지 않다가 한국전쟁이후 피란민들이 생계유지 차원에서 수산업과 수산가공업에 종사하면서 남포동과 함께 부산의 최대 인구 밀집지역으로 등극한다.
영도의 대평북로와 남로는 예나 지금이나 배를 만들거나 수리하는 조선소들이 있다. 전쟁 피란민이 가세하면서 부산의 어부가 5~6배 폭증하면서 늘어난 대평동의 배 건조 수리 일감은 지금의 세계 최고 한국 조선기술의 모태가 됐다. 잡은 고기는 영도다리 건너 남포동으로 옮겨지거나 봉래동의 어묵공장 삼진식품으로 보내진다. 1차산업 중심이던 영도에 1,2,3차 산업이 한꺼번에 발달한 것도 부산이 피난지 수도의 역할을 하던 때부터였다.
영도다리 건너 자갈치 시장도 피란민의 생계유지 때문에 만들어졌다. 영도와 자갈치를 이어주는 영도다리는 들어올린 다리가 하늘로 치솟는 모습이 신기해 별로 갈 곳 없는 구경꾼들도 많이 모였다. 그래서 한국전쟁당시 영도다리 앞은 이산가족 만남의 광장 노릇도 했다.
부산지하철 자갈치역 다음 정차역인 토성역 8번출구를 나와 부산대 병원을 끼고 아미동 쪽으로 올라가면, 감천동, 아미동, 우암동, 초량동으로 끝없이 펼쳐진 달동네를 마주하게 된다. 밤이되면 ‘세계 최대 규모의 비정형 빌딩’으로 탈바꿈하는 이곳의 탄생 고리 역시 전쟁이다. 부산이 구출한 대한민국의 흔적이다.
아미산과 아미산 행복센터에서 좌회전해 아미성당과 감정초등학교를 지나면 울긋불긋한 꼬방동네를 만난다. 감천문화마을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여러 문양을 병치혼합한 큰 물고기 모자이크가 반기고, 비가 오나 눈이오나 지붕과 담벽위에 앉아있는 세계 각국 조각상이 관광객에게 인사한다. ‘반지의 제왕’ 골룸 모습의 조각상도 귀엽다. 집집마다 그림이 그려져 있다. 191호 집은 감천마을의 옛 모습을 벽화로 그려놓아 이채롭다.
감내맛집 앞에는 항도 부산 바다를 지켜준 등대 벽화가 문화촌의 분위기를 잡아준다.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마을회관 인근 나무벤치 옆에는 초원위 아이들의 희망 어린 표정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 ‘우인(友人)’에는 한국 일본 중국 등 관광객의 사랑과 우성의 맹세가 빼곡히 적혀있다.
주민과 이 마을로 이주해온 작가들은 수제 공예품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골목가게의 상품은 주민 모두가 주주가 된 ‘메이드 인 마을기업’ 산물이다. 핸드백, 복주머니, 인형, 머그컵 등은 예술혼과 접목되면서 작품이 되었고, 그 지긋지긋했던 피난민 판자집도 인형으로 태어났다. 문화촌 전망대에서 바라본 영도다리와 달동네는 슬픔과 고난을 넘어 희망을 다잡은 꿈의 마을이었다.
다시 부산대병원쪽으로 나가서 부민동주민센터로 향하면 우암마을에 있는 임시수도 기념관을 만나게 된다. 감천과 초량 사이에 있는 구국의 피란처, 희망의 달동네를 치휘하던 정부청사라고 보면 된다. 부산 산업의 1세대 동명목재, 광명합판이 있던 곳이다. 합판 가공은 섬세함이 필요하기에 여성의 사회진출이 처음으로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임시수도 기념관은 1926년 경남도지사 관사였으나, 임시수도 시기 대통령 관저 및 정책결정의 핵심 본거지가 됐다. 전쟁 발발과정, 목재공장과 소 막사가 밀집된 우암동에 이북 출신 피란민들이 몰려든 경위, 전시 행정의 실행 과정등도 소개되지만, 전쟁중 군량미를 빼돌린 사건, 집권세력들이 전쟁중에도 국민을 속이고 나라 재산을 횡령한 비리 등도 객관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집무실에 박제된 이승만 전 대통령의 한가로운 모습이 이채롭다.
초량동에는 이야기가 넘친다. 전쟁이야기, 일본사람 이야기, 글로벌타운 이야기 등 다채롭다. 힘든 달동네 피난살이 동안 사람들은 이어준 산복도로엔 그래서 유치환의 편지통이 있고, 이바구(이야기)길이 있다. 이바구길 168계단은 경제생활공동체를 이어주던 메신저였다. 피란민들은 경제터전인 항구와 판자집을 이어주던 이 길을 숱하게 오르내리며 부산을, 대한민국을 지탱하고 가꿔왔던 것이다. 국제 문물을 받아들인 1번지답게 최초의 근대식 개인종합병원(백제병원), 최초의 창고(남선창고), 부산 최초의 교회(초량교회) 등 최초가 유난히 많다.
피란을 온 사람들은 제 고향으로 갈 것이지, 상당수가 부산에 남았다. 힘겹지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또 짙은 어둠속에서 출발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희망의 크기를 키울수 있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지켜낸 부산 1세대들의 의지는 마침내 세계 지도자들을 불러모았고, 마천루 같은 해운대 국제도시를 세웠으며, 2028년 올림픽 단독개최를 꿈꿀 만큼 커져만 가고 있다.
함영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