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 가속화...한미일 증시 폭락 요인 꼽혀
엔캐리 트레이드, 퍼펙트스톰 될까 우려
지난 5일 일본 도쿄에서 한 행인이 닛케이225평균주가(닛케이지수) 현황판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있다. 이날 닛케이지수는 전장 대비 4451.28(12.40%) 하락하며 일간 하락률과 하락폭 모두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EPA] |
“세계 최대 규모의 ‘캐리 트레이드’ 청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몇 사람의 머리가 깨지지 않고선 불가능할 겁니다.” (킷 저크스 소시에테제네랄 글로벌 거시 전략가)
‘검은 월요일(8월 5일)’로 불리는 글로벌 주요국 증시의 폭락장 여파가 진정세로 접어들고 있지만, 글로벌 금융 전문가들은 여전히 변동성이 큰 ‘살얼음판 행보’를 이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불안해하는 모습이다. 이는 알고리즘 매매 등과 함께 이번 폭락장의 ‘원흉’ 중 하나로 지목된 ‘엔 캐리 트레이드(이자율이 낮은 엔화를 빌려 고금리 통화나 성장 자산에 투자하는 것)’ 청산 문제가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을 뿐, 올해 내내 이어지며 글로벌 증시를 쥐고 흔들 것이란 걱정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움직임, 왜?=이번에 문제가 불거진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플라자 합의’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플라자 합의’란 1985년 9월 22일 미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주요 5개국(G5) 재무장관들이 모여 목표 환율을 정해 놓고 그 선에 이를 때까지 미국 달러화를 매각하고 일본 엔화는 사 모으기로 담합한 합의다.
이번에 불거진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은 일본은행(BOJ)이 지난달 31일 단기금리를 0~0.1%에서 0.25%로 인상한 가운데,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9월 피벗(pivot, 금리 인하)론’에 무게가 실리면서 촉발됐다. 미일 장기금리 격차가 축소될 것이란 전망에 엔화가 강세로 돌아섰고, 엔화 약세에 베팅했던 투자자들은 손실을 우려해 서둘러 청산에 나섰다. 저금리에 엔화를 빌려 미국 기술주 등에 투자했던 자금을 회수했고 ,이를 엔화로 바꾸는 과정에서 엔화 강세 현상을 더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불과 한달 전 161엔대였던 달러·엔 환율은 지난 5일 한때 141엔까지 치솟았다.
미국 투자전문매체 배런스의 앨런 루트는 “일본의 앤 캐리 트레이드가 시장을 폭발시키고 있다”고 꼬집었다.
마크 다우딩 블루베이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미국 고용 데이터에서 경제 경착륙을 시사하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며 “증시 폭락의 배경은 캐리 트레이드 청산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엔캐리 전체 규모 알면 추가 청산 규모도 보인다?=금융투자업계의 관심은 엔 캐리 트레이드의 전체 규모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로 향한다. 향후 증시 등 자본시장의 변동성을 극대화할 추가 청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증시 자금과 달리 정확한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 규모를 알 수 없는 이유는 개인부터 헤지펀드, 소규모 자산운용사, 사모펀드, 일본 기업 및 기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운용되는 만큼 종합적인 집계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1990년 초반부터 현재까지 엔 캐리 트레이드에 쓰이고 있는 엔화의 규모는 총 20조달러(약 2경7538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도이체방크(DB)가 IMF 데이터 등을 토대로 추산한 바 있다. 최근 UBS의 제임스 맬컴 글로벌 전략가는 2011년 이후 누적 달러·엔 캐리 트레이드 규모를 약 5000억달러(약 688조원)로 추산했다. 이 가운데 절반 가량은 지난 2~3년 사이에 쌓인 것이란 게 맬컴 전략가의 판단이다.
일본 엔 해외 대출 규모로도 어림짐작 해볼 수 있다. ING의 분석에 따르면 2021년 이후 올 3월까지 일본 엔화 해외 대출 규모는 21% 증가해 1조달러(1376조원)에 달했다. 모든 금액이 엔 캐리 트레이드에 활용된 것을 아니지만,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국경을 건너는 엔 차입 규모가 2021년 말 이후 7420억달러(약 1021조원) 늘었다는 분석도 있다.
천문학적 규모를 자랑하는 만큼 엔 캐리 트레이드의 일부 금액만 청산되더라도 글로벌 증시 등에 미칠 영향력은 폭발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JP모건 등 월가 투자은행들은 최근 몇 주 간 엔 캐리 트레이드가 50~60%가량 청산됐다고 추정하고 있고, 맬컴 전략가도 전체 자금 중 40% 수준인 2000억달러(약 275조원)가 청산됐다고 봤다.
역사적으로 엔 캐리 트레이드가 급격히 청산됐던 대표적인 시점은 1998년(한국 IMF 사태 등 아시아 금융위기), 2008년(미 서브프라임 사태 등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코로나19 팬데믹)이다.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1998년 당시 미 증시와 유럽 증시는 각각 고점 대비 14%, 27% 하락했고, 2008년엔 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가 40% 넘게 하락한 바 있다.
코스피 고점 대비 낙폭은 1998년 38.9%, 2008년 58.7%, 2020년 35.7% 등으로 훨씬 더 컸다. 사실상 코스피 지수의 3분의 1에서 절반 이상이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의 여파로 증발해버린 셈이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이 한창 진행된 것으로 알려진 지난 2·5일 불과 2거래일 간 코스피는 12.10% 하락한 바 있다.
증권가에선 이 때문에 당장 엔화 환율에 주목하고 있다. 엔 캐리 트레이드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가장 빠른 지표이기 때문이다.
전규연 하나증권 연구원은 “우치다 신이치 일본은행 부총재가 시장이 불안할 때 금리 인상에 나서지 않겠다고 발언한 만큼 추가 금리 인하는 연말 경에나 단행될 가능성이 높아 당분간 엔화 강세 유인이 크지 않다”면서 “여전히 엔 캐리 트레이드 수익률이 과거 대비 높다”고 짚었다.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의 영향력 자체가 과거와 달리 엔화의 위상이 약화된 점을 볼 때 작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과거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은 바꿔 말해 곧 안전자산 선호로 봐도 무방했다”며 “유사시 엔화가 강세를 보이며 엔캐리 트레이드 청산을 가속화했던 1990년대, 2000년대와 달리 현재 글로벌 수출시장에서 차지하는 일본의 비중은 3%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신동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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