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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박노수, 산정도(일부), 1960, 종이에 수묵채색 [이원율 기자]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어느 수집가,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초대장을 받고 최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이른 오전 '오픈런'을 했는데도 수집가의 집 앞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전시를 빙 둘러봤습니다. '고 이건희 컬렉션 기증' 1주년을 맞아 기획된 만큼 공 들인 게 느껴졌습니다. 335점의 유물 중에는 "네가 왜 거기에 있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유명한 작품, "이건 무조건 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잠재력이 큰 작품이 꽤 보였습니다.

'어느 수집가의 초대' 연수를 마친 〈후암동 미술관〉이 특히 인상 깊게 본 작품 5점을 소개합니다. 다녀오신 분은 여운을 되살리는 느낌으로, 가지 않으신 분은 '맛보기'의 느낌으로 감상하시면 좋겠습니다. 작가와 작품 해설에는 주관적 해석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면, 출발합니다.

①박노수, 산정도
박노수, 산정도, 1960, 종이에 수묵채색 [이원율 기자]

에 탄 벌거벗은 여인이 냅다 달립니다. 비장합니다. 행여나 말이 뜀박질을 멈추고 도망갈까 싶은지 한 손은 채찍, 다른 손은 말의 목덜미를 꽉 쥔 상태입니다. 다행히 말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기운이 넘쳐흘러 닥치는 대로 뛰어넘고 싶을 뿐입니다. 이들 앞에 거대한 바위산이 있습니다. 수풀이 우거진 게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듯합니다. 여인과 말에게 이 산은 멈춤의 표시가 아닙니다. 남들은 '갈 수 없으니 돌아가시오'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이들에겐 그저 '약간 험한' 길일 뿐입니다. 여인은 땅을 보고 있습니다. 말은 하늘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위산 따위는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오른쪽 위에는 눈썹달이 떠 있습니다. 여인과 말, 나무와 풀 등 땅 위 생명체는 모두 달빛에 은은히 젖었습니다. 이 여인이 그렇게 내달리며 가고 싶은 곳은 어딜까요. 까마득한 달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산꼭대기가 아닐까요. 영험한 달빛에 몸을 맡겨 각성(覺醒)의 순간을 경험하고 싶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노수의 '산정도'를 삶에 빗대면요. 인간을 말에 올라탄 여인, 그 인간이 추구하고 상상하는 이상, 그리고 그 앞에 놓인 도전 과제바위산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2014년 1월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신년사 중 "자유롭게 상상하고 마음껏 도전하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이상을 위해서라면 눈앞 위기 따위야 아무런 걱정이 없는 듯 한껏 자세를 낮춰 투쟁하는 여인, 그녀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돼 목표를 향해 도약하고자 하는 말을 보면 기업과 임직원의 관계도 연상됩니다.

대한민국 한국화 1세대 작가인 박노수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청아한 선비와 여인, 세속을 멀리 두는 소년, 노인 등입니다. 상당수 작품은 고요하고 정적입니다. 여백의 미도 살아있습니다. 그런 그가 이같이 역동적인 그림도 그렸습니다. 이 작품이 그려질 시기에 박노수는 작가와 교육자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산정도를 통해 삶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하고, 이와 함께 앞으로도 지향점을 향해 중단 없이 내달리겠다는 결의를 보인 게 아닐지요. 한편 이 그림은 강렬한 푸른빛과 청색으로 물든 사람과 말 덕에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2009)를 떠올리게 하는데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 작품이 영화보다 49년이나 빨리 만들어졌습니다.

②이중섭,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중섭, 섶섬이 보이는 풍경, 1951, 패널에 유채 [이원율 기자]

색채가 다양합니다. 어디 하나 튀는 색이 없습니다. 진한 색, 옅은 색 모두 색채 이상의 따뜻한 느낌을 줍니다. 그림은 촉촉하고 아련합니다. 어릴 적, 풀밭에서 뛰어놀던 추억이 있을지요. 지금도 종종 꿈속에서 그 산과 그 언덕이 등장하곤 하는데, 꼭 그 풍경 같습니다. 가만히 쳐다보면 코끝이 시려집니다. 저 멀리에 섶섬이 보입니다. 제주 서귀포시에서 고작 3㎞ 떨어진 면적 0.1㎢의 작은 섬입니다. 용이 되고 싶었던 꿈을 못 이루고 죽은 구렁이의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푸른 물이 섶섬을 에워싸고 있습니다. 바다를 볼 수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초가집이 다닥다닥 붙어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저마다의 행복을 성실히 가꿔가고 있습니다. 봄 개나리와 가을 단풍 같은 색이 마을에 듬뿍 칠해져 있다는 점, 곳곳에 멋들어지게 가지를 뻗친 나무들이 있다는 점 등이 이를 짐작하게 합니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나희덕, 섶섬이 보이는 방 일부 발췌

이 그림을 그릴 무렵 이중섭은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마사코두 아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1950년에 터진 6·25 전쟁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습니다. 북한 평원에서 나고 자란 이중섭은 폭격의 위험을 피해 월남합니다. 작품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또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피난길 이후 어머니는 영영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공산당원 무리에 끌려간 이중섭의 형 광석이 돌아오지 않았다며 떠나기를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이중섭에게 어머니와의 이별은 너무나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중섭은 눈물을 머금고 떠납니다. "남은 가족과는 절대로 헤어지지 않겠다. 이들과의 순간순간을 모두 소중하게 여기겠다…." 분명 이런 다짐을 했을 겁니다. 1951년 1월, 내려오고 내려오던 그의 발걸음은 제주 서귀포시까지 닿습니다. 이중섭과 마사코, 겨우 5살과 3살밖에 되지 못한 어린 아들 둘은 섶섬이 보이는 이 마을에서 1.4평짜리 방을 얻어 삽니다. 그래도 이중섭은 행복했습니다. 좁은 방이지만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장 먹을 게 없어 배급받은 쌀로 끼니를 때웁니다. 당연히 턱없이 부족합니다. 해안가에 있는 해초를 뜯어 죽을 쑤고, 작은 게를 잡아 반찬으로 둡니다.

이중섭, 그리운 제주도 풍경

그래도 이중섭은 눈물 나게 행복했습니다. 모든 순간을 사랑하는 가족과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해초를 뜯는 일, 게를 잡는 일 함께라면 즐거운 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중섭은 가끔은 혼자, 때로는 가족과 함께 가까운 언덕에 올라 섶섬을 즐겨봤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고 할 수 없을 만큼의 평화로운 장면을 보며 밝은 미래를 꿈꿨습니다. 그때 함께 산 마을 주민들은 "이중섭이 화내는 얼굴을 정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고운 사람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따뜻하기만 한 이 그림이 슬프고 쓰라린 그림으로 칭해지는 건 이중섭의 이후 생 때문입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린 뒤 다시는 이런 작품을 내놓기가 힘들 만큼 고통에 갇혀 살았습니다. 가난을 해결할 수 없던 이중섭은 제주 땅을 밟았던 그해 12월에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부산으로 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삶의 전부였던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냅니다. 장인의 부고가 이유였습니다. 아내와 차남의 건강이 무척 나빠진 데 따른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중섭은 당시 한일 간 국교 단절 등으로 함께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1953년, 이들은 일주일간의 재회를 한 뒤 그 다음부터 영영 만나지 못했습니다. 1956년, 이중섭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가족과 다시 만나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며 막노동을 하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런 이중섭에게 '섶섬이 보이는 풍경'은 스쳐만 봐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그림일 테지요.

③곽인식, 작품 87-A1
곽인식, 작품 87-A1, 1987, 캔버스-종이에 수채 [이원율 기자]

흰 배경에 원형 또는 계란형 점이 무수히 쌓여 있습니다. 수국밭, 탱글탱글한 포도알, 연못 위를 떠다니는 꽃잎, 바닷물과 해초를 머금은 돌멩이, 땅바닥에 떨어진 뒤 번져가는 빗방울 등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을 대면 한 두 마디는 쑥 들어갈 듯한 깊이감도 느껴집니다. 반투명 색점들은 흡습성이 좋은 일본식 종이 화지(和紙)에 내려앉았습니다. 농담 변화에 따라 속이 훤히 보이기도 하고, 진하게 존재감을 내뿜기도 합니다. 종이 고유의 색인 백색은 밑으로 갈수록 영역을 넓혀갑니다. 동양적 신비감에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작품입니다.

미술적 재능이 출중했던 곽인식은 1937년 형과 삼촌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을 배웁니다. 유리, 황동, 종이 등 사물의 물성(物性)을 조명하는 작품들을 꺼내놓던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회화에 집중합니다. 특히 이쯤부터 붓으로 종이에 계란형 점을 연속적으로 찍는 채묵 작업에 몰입하게 됩니다. 곽인식은 이러한 채묵 작품 제목에 '작품(작업·Work)', '무제(Untitled)' 등의 말을 붙입니다.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제목을 달면 불필요한 연상을 한다'는 철학에 따른 나름의 배려였습니다. 사실 이 그림도 어떤 제목이 붙었다면 상상력의 폭이 확 줄었을 겁니다. 곽인식은 한국의 단색화 양식, 일본 현대미술의 한 흐름인 모노파에 영향을 줬습니다. 공로와 비교해선 지명도가 높지만은 않은데요. 미술계에서는 최근 들어 "곽인식을 제대로 평가해보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④권진규, 손
권진규, 손, 1963, 테라코타 [이원율 기자]

누군가는 이 손을 보고 모내기를 하는 할아버지의 손을 떠올립니다. 또 누군가는 밭을 매는 할머니의 손, 굳은살이 붙어있는 아버지어머니의 손을 연상합니다. 모든 이가 각자 다른, 약간은 서글픈 사연이 담긴 손을 생각합니다. 거칠고 억센 손입니다. 뜨거운 햇빛, 몰아치는 바람에 오랜 기간 숙성된 듯합니다. 윤기 나는 반지, 반짝이는 팔찌 등 인공적 장신구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투박한 손이지만, 마냥 '못난 손'으로 보이지는 않지요. 이 가득합니다. 근육의 움직임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동작도 정교합니다.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 같기도, 애타게 갈망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인간은 이 험한 손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가정을 꾸렸고, 나라를 일으켰습니다. 서구의 바람을 타고 온 추상 작품이 유행하던 때에 조각가 권진규는 대세를 뒤로 하고 사실주의에 몰두했습니다. 있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화려한 장식도, 현란한 기교도 뒤로한 채 본질에 충실히 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권진규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성영원성을 지닌 묵직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권진규는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현대 한국 미술의 3대 거장으로 꼽힙니다. 권진규는 1948년 일본의 명문 미술전문학교인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조각을 배웁니다. 1959년에 돌아와 테라코타 등을 주재료로 작품 활동에 나섭니다. 테라코타는 이탈리아어로 '구운 흙'이라는 뜻을 갖는데요. 특히 흙의 색감과 질감에 푹 졌던 그는 서울 돈암동 마루턱에 작업실을 차려 작품 활동을 이어갑니다. 개인전도 3차례 열었습니다. 평가는 꽤 괜찮았지만 그가 기대한 수준만큼은 아니었습니다. 1973년 5월4일 오후 3시. 권진규는 친구 두 명에게 "인생은 공(空), 파멸"이라는 글을 남긴 뒤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한국에서 리얼리즘을 정립하고 싶다. 만물에는 구조가 있다. 한국 조각에는 그 구조에 대한 근본 탐구가 결여돼 있다. 우리 조각은 신라 때 위대했고, 고려 때 정지했고, 조선조 때는 바로크(장식화)화했다. 지금의 조각은 외국 작품의 모방을 하게 돼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학생들이 불쌍하다." 살아생전 권진규는 '평소 신념'을 묻는 기자의 물음에 이같이 답변했습니다.

⑤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클로드 모네, 수련이 있는 연못, 1917~1920, 캔버스에 유채 [이원율 기자]

꽃송이가 연못 위에 피었습니다. 작지만 화사합니다. 몇 송이 되지 않는데도 생명력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얇은 잎이 꽃 주변을 두둥실 떠다닙니다. 유리처럼 투명한 은 땅 위로 몸을 뻗고 있는 초록 나뭇잎과 나뭇가지들을 비춥니다. 물 안 푸른 이끼와 버무려져 그 자체로 일렁이는 녹색 불길이 된 듯합니다. 내리쬐는 도 충분히 담겨 있습니다. 희고, 노랗고, 누런빛은 착실히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선과 색채가 다 흐릿합니다. 경계선은 거의 없어 보이고요. 이런저런 색을 얇게 펴 바르고 얹어놓은 통에 사실 꽃과 잎 말곤 정확히 뭘 그렸는지 확신키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발 담그고 첨벙첨벙 뛰어노는 그런 물이 아니라, 잔잔한 음악 깔고 근처 널찍한 돌에 앉아 윤슬이나 봐야 하는 물 같습니다.

모네의 그림 수련 연작 중 하나입니다. 근성의 남자 모네(“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참고)는 말년 시절 수련에 제대로 꽂혔습니다. 정말 지겹도록 수련을 그렸습니다. 그가 프랑스 파리 근처에 있는 지베르니 땅을 사고 연못을 꾸민 가장 큰 이유 또한 '수련을 실컷 그리고 싶어서'였습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구한 수련 그림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요소는 제작 연도입니다. 모네의 수련 그림은 그가 그린 시기별로 분위기가 다른데요. 그가 앓던 백내장때문입니다. 모네는 1912년, 72세 나이에 백내장 진단을 받았습니다. 수십년간 홀린 듯 빛을 쫓아다닌 결과였습니다. 두 눈에는 점점 더 빨간색과 노란색, 자주색 등의 '필터'가 씌워졌습니다. 증상은 조금씩 악화했습니다.

클로드 모네, The Japanese Bridge, 1920~1922

1918년, 78세부터는 정밀한 색 구별이 어려워졌다고 하지요. 실제로 1918년 후부터는 붉은 색채의 그림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결국 1923년, 83세에 백내장 수술을 받게 됩니다. 이건희 회장이 품은 모네 그림의 제작 연도는 1917~1920년입니다. 모네가 색 구분마저 어려워하기 직전쯤에 붓을 든, 어찌 보면 모네가 자신의 '진짜 눈'으로 작업에 나섰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라는 데서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보

전시명 :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기간 : 2022.4.28.~2022.8.28.

장소 :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교체 전시품 : ‘추성부도’ 6월, ‘불국설경’ 7월, ‘화접도’ 8월 ('인왕제색도' 5월)

yul@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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