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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남녀 대결을 넘어선 올림픽 정신

X부장은 ‘피곤’이라는 단어를 이마에 붙이고 출근했다. 상사의 심기 파악을 주요 업무로 생각하는 Y차장은 재빠르게 한마디를 던졌다. “요즘 열대야로 잠을 잘 수가 없네요.” X부장은 충혈된 눈으로 “그렇지”라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다른 것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Y차장 뇌리를 스쳤다. “올림픽 축구도 시원하게 골이 터지면 좋았을 텐데, 짜증 나더라고요.” Y차장은 두 번째 미끼를 던졌다.

X부장은 눈을 비비더니, 커피나 한잔하러 가자고 일어섰다. ‘적중했다’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Y차장은 X부장의 발걸음을 뒤따랐다.

요지는 지난주 말 한국 축구가 멕시코에 패배한 것과 달리 한국 여자 배구가 일본을 꺾으면서 부부 사이에 남녀 대결 전선이 형성됐다는 얘기였다.

“축구 때문에 가뜩이나 짜증 나 있는데, 와이프가 대뜸 여자 배구 이야기를 하더군. 공중파 방송이 남자 축구만 중계하고 여자 배구는 중계하지 않았다고 혀를 차더라고. 그리고 남자 축구 대신 여자 배구를 본 사람은 짜릿한 승리감을 맛봤다는 댓글도 아주 친절하게 전해주더군.”

X부장은 여대 출신 와이프의 말속에 뼈가 느껴졌다. 평소 가부장적인 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대한민국 남성을 대표해 X부장에게 표출해왔다는 점에서 여자 배구팀에 대한 칭찬은 곧 대한민국 남성에 대한 비하로 느껴졌다.

X부장은 곧바로 유튜브로 들어가 여자 배구 8강전 하이라이트를 확인했다. 정말 그랬다. 김연경 선수의 활약도 돋보였지만, 일본 선수와 치열한 승부를 펼치며 결국 승리를 이끌어내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X부장은 시원하게 박수를 칠 수 없었다. “여자 배구팀을 칭찬하면, 남자가 밀리는 느낌이 들 것 같더군. 그래서 꾹 참았지.”

답답한 마음에 X부장은 올림픽 메달 수를 세어 보기로 했다. 남자가 많이 땄는지, 여자가 많이 땄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자가 많으면, 와이프에게 으스댈 요량이었다. 전체 메달 획득 수에서는 남자 선수가 조금 더 많은 것을 확인한 X부장은 “남자 선수들 활약이 대단하네. 획득한 메달 수가 여자보다 많아”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X부장의 아내는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금메달은 여자 선수들이 더 많이 땄다는 것을 모르진 않겠지.”

부부의 갈등 전선은 올림픽 여자 양궁 3관왕에 오른 안산 선수가 짧은 헤어스타일을 이유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공격 받고 있는 소식과 맞물리며 확대될 찰라였다. 다행히 X부장의 열 살짜리 아들이 한마디 하면서 일단락 됐다고 한다. “아빠, 머리카락이 짧다는 이유로 여자 양궁 선수를 미워한다는 것은 말도 안돼. 그런 사람은 올림픽 못 보게 해야 해. 그럼 남자는 머리카락도 못 길러?”라고 말했단다.

X부장은 올림픽 헌장(Olympic Charter)까지 들먹이며, 자기반성과 함께 아이 자랑에 나섰다. “내가 좀 찾아봤는데, 올림픽 헌장 기본원칙에 ‘성별이나 종교 인종 등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더군. 열 살짜리가 어떻게 알았을까. 대단해. 하하.”

X부장의 아들 자랑에 손발이 오그라들었지만, Y차장은 잠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틈타 여름휴가 일정을 확정할 수 있었다.

pdj24@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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