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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장은 비단, 덕행은 보석” 해동공자 최충의 후예들 [남도종가]
해주최씨 ‘계이자시’ 가르침 1000년 실천
최자, 이규보인문학 계승 발전 보한집 남겨
종부들 나눔 실천하고 전통음식 명맥 계승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고려 초기인 986년 황해도 해주 지역 호장 최온(해주최씨 시조)의 아들로 태어난 최충은 1068년까지 장수하며 많은 인문학 성과를 일궈낸 현자, ‘해동공자’이다.

요즘말로 치면 ‘덕행이 남는거다’라고 가르친 최충의 가훈 계이자시

“집안대대로 좋은 물건은 없으나, 귀중한 보물만은 간직해 왔다. 문장을 비단으로 여겼고, 덕행이 곧 보석이니라. 오늘날 서로에게 이르는 말을 훗날 부디 잊지 말아라. 그러면 나라에 귀중히 쓰이게 되며 대대로 더욱 번창하리라.”

그가 남긴 가훈이 ‘계이자시(戒二子詩)’는 지금도 해주최씨 집안에서 그대로 이어 실천하고 있다. 가훈에 멋드러진 제목도 없이, 그냥 두 아들에게 이르는 시(詩)이다.

해주최씨는 전국 각지에 퍼졌는데, 해동공자의 가르침을 잘 전승한 전남 강진군 군동면 신기마을 최각종가 집성촌에서 해동공자의 인문학적 자취를 잘 발견할 수 있다.

1000년 간 잘 정립한 인문학의 실천은 나눔과 음식문화의 발전으로도 이어졌다. 종가는 흉년에 고을 공동체의 백성들을 구휼하고, 종가 및 마을 전통음식을 계승했다.

종부 백정자씨가 전통의 맛이 살아 숨쉬는 장독을 살피고 있다.
강진 신기바을 영농조합 ‘담가온’

된장 등 전통장류사업을 추진해 마을 공동으로 강진전통된장영농조합 ‘담가온’을 운영하고 있다. 종부 백정자씨가 드넓은 장독대와 메주 건조장을 일일이 살피며 집안 대대로 이어온 맛이 제대로 발현되는지 늘 살핀다.

고려 총리격인 문하시중 최충은 왕으로부터 팔걸이의자와 지팡이를 하사받았을 정도로 평생 국정과 학문을 돌보았다. 그의 장남 최유선(1010~1068)은 한림학사·형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에, 차남 최유길(?~?)은 태자빈객·상서좌복야를 거쳐 상서령에 올르는 등 학문과 국정의 안정감을 도모했다.

5세손 최약(?~?) 예부상서 한림학사는 예종이 정사를 돌보지 않고 대동강 연회에 몰두하자 목숨을 건 간언으로 중지시켰고, 좌천되는 대가를 치렀다. 말직으로 쫓겨나면서 쓴 시가 동문선에 실렸다.

보한집으로 유명한 최자(1188~1260)는 8세손이다.충청 전라 안찰사·한림학사승지를 거쳐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직을 수행했다. 보한집은 이규보의 문학을 계승·보충한 속파한집이다.

유명한 조선의 집현전 학사 최만리(?~1445)는 해주최씨 14세손이다.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집현전부제학을 역임했다.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으나, 한자음 연구서 저술방법론을 둘러싸고 세종대왕와 의견을 달리하면서 사직했고 청백리에 녹선됐다. 그의 아들 최각(1426~1505)은 보령현감을 역임하고 현감공파를 열었다. 최각의 누이는 율곡 이이의 증조부인 이의석과 결혼했다.

강진 해주최씨 현감공파 최각종가 안채의 질박한 모습

19세 최우(1543~1613)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의 창의에 참여하고, 명나라 지원군의 향도장으로 공을 세웠으며, 행담양도호부사를 역임하고 강진에 입향했다. 선무원종공신에 올라 명곡서원에 배향됐다.

최우의 아들 최유건(?~?)은 무과에 급제하고 판관을 지내고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됐다. 도탄에 빠진 강진군민 구제를 청원하는 상소문 ‘청차강진수소’가 칠실유고에 남아있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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