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설] 수명 다한 재벌 총수 지정제, 이참에 혁파해야

공정거래위원회가 역대 가장 많은 71개의 그룹사를 공시 대상 기업집단(자산총액 5조원 이상)으로 지정했다. 배우자나 가까운 친·인척과의 거래 공시 의무, 시장지배력 남용, 일감 몰아주기 금지 등의 규제를 받는 대기업 숫자가 사상 최대 규모로 늘었다는 얘기다. 코로나19 시대 비대면경제 확대에 따른 것인지, 카카오가 23위에서 18위로 오르는 등 셀트리온 네이버 넥슨 넷마블 같은 인터넷· 바이오 대기업의 순위가 성큼 뛰었다.

그러나 가장 주목받은 기업은 이제 막 대기업집단에 이름을 올린 ‘쿠팡’이다. 미국 국적인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의 총수(동일인) 지정을 놓고 공정위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지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공정위의 결정은 에쓰-오일이나 한국GM과의 형평성, 쿠팡이 미국 증시에 상장돼 미국 규제기관의 감독을 받는다는 점 등이 참작된 것으로 보인다. 또 현시점에서 김 의장 개인이나 친족이 가진 국내 회사가 전혀 없다는 것도 고려됐다. 그러자 경실련 등 시민단체에서 그간 공정위가 대기업 총수를 지정할 때 ‘사실상 지배력’을 중시했던 점과 배치된다고 반발했다. 대부분의 쿠팡 사업장이 국내에 있다는 점을 들어 ‘국내 기업 역차별’을 제기하기도 했다. 앞으로 경쟁이 예상되는 네이버의 경우 지분이 4%뿐인데도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는 총수로 지정됐다고 꼬집었다. 이들은 만약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일본 국적을 취득하면 어찌할 것인지를 되묻기도 했다.

이 같은 ‘쿠팡 특혜 논란’은 34년 묶은 낡은 제도가 확 달라진 글로벌 산업지형에서 더는 작동하기 어렵다는 점을 일깨운다. 동일인 규제는 1987년 당시 가족 중심 경영을 통해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하고 가족 각자가 소유한 계열사 간 순환출자로 기업 전체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는 재벌 체제를 견제하기 위해 탄생했다. 당시 국가 주도 성장정책 아래서 주요 재벌들이 특혜를 누린 것도 사실이기에 규제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카카오와 같은 혁신형 기업들이 한국 경제의 주요 플레이어로 급부상하고 있다. 삼성 현대차 SK LG 등 4대그룹을 비롯한 주요 대기업도 대부분 과거 총수 1인 체제가 아닌 전문경영인과 이사회 중심의 수평적인 의사 결정 체제를 갖추고 있다.

공정위도 현행 ‘동일인 지정’ 제도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개선책을 찾고 있는 점은 다행이다. 국경이 무의미해진 글로벌 투자 환경에서 쿠팡처럼 해외 증시에 상장하려는 혁신기업은 앞으 로 더 많아질 것이다. 이미 구닥다리가 된 제도로 이들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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