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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인규의 현장에서] 희망고문

“정부가 지난 2월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되면 코로나가 곧 종식될 것처럼 말했잖아요. 그런데 75세 이상인 우리 아버님도 아직 백신을 못 맞고 있는 상황인 거죠. 차라리 솔직하게 ‘노력하고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말하는 게 맞지, 이거 ‘희망고문’ 아닌가요?”

서울에 사는 40대 A씨는 백신 접종계획에 답답함을 넘어 포기에 가까운 한숨을 토해냈다. 자기 순서는 바라지도 않으니 몇 달째 제대로 된 외출을 못하고 계신 부모님이라도 어서 빨리 접종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내 코로나19 백신 접종계획이 시간이 지날수록 풀리기는커녕 더욱 꼬여만 가는 모습이다.

정부가 확보했다는 총 7900만명분의 백신 중 상반기에 도입되는 백신은 1040만명분으로, 전체의 8분의 1 정도에 그친다. 그나마 이 중에서도 확정된 물량은 904만명분뿐이다. 나머지 136만명분은 아직 초기 물량조차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불확실성은 최근 불거진 백신 안전성 문제 때문이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에 이어 국내 600만명분이 들어올 얀센 백신까지 혈전 논란으로 미국 등에서는 접종이 일시 중단된 상태다. 모더나 백신은 미국이 물량을 선점하면서 국내 도입 스케줄이 뒤로 밀릴 처지다. 2000만명분을 계약했다던 노바백스 백신은 아직 허가조차 되지 않은 미지의 백신이다. 들어오더라도 3분기나 돼야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변수가 이어지자 정부의 말은 계속 바뀌고 있다. ‘들어 올 백신이 충분하다’며 자신감 있던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해외 상황을 지켜봐야 알 수 있다’며 한 발 빼는 모양새다. 그러면서도 ‘11월 집단면역 형성 목표를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가겠다’는 근거없는 자신감만 내비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주에는 중앙방역대책본부 브리핑 중 ‘국내 한 제약사가 8월부터 해외에서 승인된 백신을 위탁 생산하는 계약을 체결 중’이라는 발표까지 했다. 그동안 백신 도입 일정 등에 대해서는 확정 전에는 비밀을 유지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중대본은 추가 정보에 대해서는 확인해줄 수 없다며 선을 그었고 이에 후보로 지목된 몇몇 기업의 주가가 요동치는 혼란만 발생했다.

한 백신 전문가는 “정부가 급하긴 급했나 보다. 아직 확정도 되지 않은 내용을 마치 다 된 밥처럼 말했다는 건 그만큼 백신 수급계획이 잘되지 않고 있다는 방증 아니겠느냐”며 “차라리 ‘노력하고 있지만 어려운 점이 있으니 기다려 달라’고 솔직히 말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어려운 팬데믹 상황에서 희망은 필요한 요소다. 희망을 가져야 버틸 힘이 생긴다. 하지만 안 될 것을 알면서도 될 것 같다는 거짓된 희망을 주는 것은 상대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 ‘희망의 메시지’도 좋지만 지금은 ‘솔직한 인정’이 더 필요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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