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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어린이들이 시로 표현한 재치와 상상력 가득한 세계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비는 오지 않는데 어디서 천둥소리가 들리나. 누런 구름이 조각조각 사방에 흩날리네”

김시습은 외할아버지에게 말보다 시를 먼저 배웠다. 두 살부터 배우기 시작한 김시습은 세 살 때 이미 유모가 보리방아를 찧는 모습을 보고 위의 시를 지었을 정도였다. 정약용은 열 살 이전에 지은 글만 모아 문집을 엮었고, 조갑동은 아홉 살에 요절했지만 시집을 간행했을 정도로 많은 시를 지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옛사람들이 어린 시절 지은 한시 40여 편을 가려 뽑아 짧은 이야기를 덧붙여 ‘옛 선비들이 어릴 적 지은 한시 이야기(알마)’로 엮었다.

조선 선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는 밤톨 속 밤알들을 형제로 묘사한 시를 지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 구봉서는 오성 대감 이항복의 집 연꽃을 땄다가 혼쭐이 나자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것은 재상이 할 일이 아니란 시를 지어 대든다. 조선 전기의 문신 채무일은 술을 좋아하는 할아버지가 책을 읽지 않는다고 나무라자 할아버지의 술버릇을 들어 반격하는 재치를 보인다. 정조는 열네 살에 당시에는 잘 쓰지 않던 ‘태양(太陽)’이라는 단어를 써서 천하를 다스릴 제왕의 기상을 한시에 담아냈다. 김인후는 다섯 살 때 ‘천자문’의 첫 장 ‘우주홍황(宇宙洪荒)”을 이용해 우주의 원리를 표현한 시를 지어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조선 중기 시인 어무적은 산이 자신을 공경해 머리에 구름관을 썼다는 시를 지어 첩의 아들로 태어나 아무도 공경할 리 없는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위로한다. 이처럼 옛 어린 시인들은 결코 어리다고 치부할 수 없는 넓이와 깊이, 재치와 상상력을 한시 속에 담아냈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어린 시인들은 신동이나 천재라고 불릴 만큼 글짓기에 탁월한 솜씨를 자랑한다. 이는 요즘 어린이들이 학교나 학원에서 또는 과외로 공부하듯 옛 어린이들도 서당에 가거나 독선생을 모시고 글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책이 소개하는 어린이의 글쓰기 스승들 대부분은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는 가까운 집안 어른들이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무릎에 앉히고 손자의 상황에 맞게 시제를 출제해 적당한 구절을 지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아버지는 아들과 마주앉아 여러 이야기를 나누다 자신이 직접 시범을 보인 뒤 시를 짓게 하고 고쳐주기도 했다. 조상들은 아이가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도록 가정교육을 이끌었다.

저자는 자식들의 교육을 학교나 학원에만 맡겨두는 오늘날의 세태를 안타까워하면서 글공부나 글짓기 교육은 부모들이 관심을 갖고 지도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저자는 “옛 사람들은 시 제목을 내어주면서 자식의 글 솜씨가 얼마나 늘었나 헤아려보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살펴보며 자식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며 “학원이 아니라 가정에서 아이들과 마주앉아 글짓기를 도와주는 부모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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