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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용성과 심미성, 절제에서 답을 찾다
<이영란 기자의 아트 앤 아트>

빼기는 어려워도 더하기는 쉬운가. 모든 게 ‘과잉’의 시대다. 특히 표현의 과잉은 어지러울 정도다. 현대미술이 그렇고, 디자인이 그렇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나만의 예술세계를 드러내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는 꼭 필요한 정점의 것만을 추려낸 절제미에 더 마음이 끌린다. 더 이상 걷어낼 게 없는 단순함을 통해 ‘뺄셈의 미학’을 보여주는 한 독특한 전시현장을 찾아가봤다.


▶신선하게 다가오는 ‘동서융합의 장’

하나 둘 셋. 둥근 전통소반 세 개가 벽에 걸렸다. 콩땜을 한 한옥 사랑방에 놓이면 제격일 법한 단정한 소반들이다. 느티나무를 깎아 만든 검붉은 소반, 한지를 꽈서(지승) 칠을 한 소반, 한지풀로 틀을 만들고 옻칠을 한 소반. 모두 군더더기라곤 없는, 달덩이 같은 조선시대 소반들이다. 얌전하게 생긴 소반들을 ‘턱’하니 벽에 붙인 것뿐인데 세련된 현대조각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멋지다. 그림자도 한몫 한다. 


전통소반 옆에는 프랑스가 사랑하는 디자이너 마르탱 세클리의 진홍빛 원형탁자가 놓여졌다. 현대 세공기술로 완성한 붉은 금속상판은 아찔할 정도로 완벽하다. “여보게들, 모든 걸 덜어낸 미니멀리즘이란 바로 이런 것이요”라고 하는 듯하다. 조선시대 낡은 소반들과 최첨단 기법으로 제작된 프랑스의 차가운 탁자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사랑스런 공간이 됐다.

어디 그 뿐인가. 전통 소반의 울퉁불퉁한 원은 중국 작가 천원지의 예리한 원형 회화와도 조응한다. 날이 잔뜩 선 둥근 원(6개)에 푸른색 물감을 칠해 마치 조각 작품 같은 착시감을 주는 천원지의 그림 ’들숨 날숨’은 단순한 미감에서 우리의 옛 소반과 호흡을 나눈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학고재갤러리(대표 우찬규)가 기획한 ‘디자인의 덕목(The Virtue of Design Furniture)’전은 이처럼 뜻밖의 조합들로 이뤄진 전시다. 서까래가 고스란히 드러난 한옥 갤러리에는 명징한 회화들과 세련되기 이를 데 없는 현대 디자인 가구들이 여러 점 들어섰다.

전시에는 전통민화인 책가도, 추사 김정희의 판전 현판 탁본과 유럽 출신으로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디자이너인 헬라 용에리위스, 부훌렉 형제, 마르탱 세클리의 가구와 조명이 어우러졌다. 광택과 무광택, 동양과 서양, 소란스러움과 깊은 고요가 서로 기묘한 화합을 이루고 있는 것.

당당하게 생긴 강화반닫이 위에는 독일 미술계가 주목하는 유망작가 팀 아이텔의 우수 어린 작은 그림이 걸렸다. 이렇듯 어울리지 않을 듯한 디자인가구(6점), 조명(3점), 고미술(9점), 회화(6점)는 뜻밖에도 참신한 동서융합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민화 책가도(冊架圖)와 영국 디자이너 제임스 얼바인의 금속책장의 조합이 좋은 예다. 얼바인이 디자인한 책꽂이는 균형있는 형태에 최소한의 변화를 가해, ‘비례와 변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조선민화와 멋진 한 쌍이 됐다.

▶실용성과 심미성 두 마리 토끼를 잡다= 디자인은 ‘쓰임’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순수미술과 구별된다. 당연히 심미성과 함께 실용성을 요한다. 이번 전시에선 실용성과 심미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 사례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특히 단순함을 추구한 현대 가구들은 기교나 각색을 최소화해 대상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즉 물건으로써의 쓰임새를 극대화하되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고, 뛰어난 미적 완성도를 지닌 디자인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단색조의 명징한 회화들이 한몸처럼 내걸렸다.

현대 가구에 어우러진 이우환의 사색적인 회화를 비롯해 정상화, 천원지의 모노크롬(단색조) 회화는 가구들이 지닌 뺄셈의 미학을 더욱 상승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이 된다. 겉으로 드러난 화려함과 혼란에서 벗어나, 풍요롭고 깊이 있는 사색의 시간을 갖게 한다.


또 계단처럼 연결된 스웨덴 산업디자인팀인 프런트(front) 디자인의 ‘디바이디드 사이드보드 #2’는 마치 마술을 보는 듯하다. 마술사로부터 배운 그들의 작업 비밀과 눈속임 기법을 활용한 검은 서랍장 세트는 공간을 유영하는 형태가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전시를 기획한 우찬규 대표는 “추사 김정희가 타계 사흘 전에 쓴 것으로 전해지는 봉은사 판전의 현판(탁본)은 이번 전시의 핵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기교가 느껴지지않는 어눌한듯한 굵은 필획은 일평생 온갖 필체를 연마한 끝에 결국 그 모든 것의 근본을 이루는 ‘기본’으로 돌아갔음을 잘 보여준다”고 밝혔다.

추사의 글씨 옆에는 프랑스 디자이너 피에르 샤르팽의 매끄러운 수납장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전시는 3월 20일까지. (02)720-1524. 사진제공=학고재갤러리.


이영란 선임기자/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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