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렇다면 죽어가는 사장 친구를 우연히 만나 자비를 받게 될 확률은 또 얼마일까?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그럼에도 극장 밖을 나설 때는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맘 한편에는 ‘내 주변엔 저런 친구 없을까’라는 부질없는 망상에 도리질 쳐본다.
중산층이 무너지는 요즘,과연 영화 같은 기적적인 일이 없고서는 양극화와 빈부격차의 높은 벽을 넘을 수 없는 걸까?
여기 현실의 일곱 남자가 있다. 고등학교 동창들로 이제 40대 중반이다. 중견기업에 다니던 친구는 구조조정 탓에 개인사업을 시작했지만 버텨내기가 어렵다. 공인중개사를 하다 지난해 부동산시장 침체를 못 견디고 폐업한 친구는 주식투자로 연명한다. 6개월치 위로금을 받고 직장을 뛰쳐나온 친구는 1년 가까이 놀다 비정규직을 마다않고 울산으로 달려갔다. 3차 하청업체쯤 되는 개인 공장이 파산한 친구는 극도의 우울증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까지 생각한 적도 있다. 이 친구는 결혼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위안으로 삼는다. 이혼한 마지막 친구는 부모집에 얹혀살며 딸 양육비를 매달 지급한다. 온전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는 공무원과 은행원 둘뿐이다.
이게 중년의 냉혹한 현실 아닐까?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 28일 “2차대전 이후 내 부모보다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그리고 부모들도 내 자식은 나보다 더 나은 수준의 삶을 살 것이란 중산층의 꿈이 사라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암울하지만 매우 현실적인 보도다. 세계화로 주가와 기업이익은 2배로 늘어나지만 노동자들의 실질임금과 삶의 질은 더욱 팍팍해진다는 이른바 ‘세계화의 덫’(한스 피터 마르틴)에 단단히 걸린 셈이다.
현 정부의 모토인 ‘중산층을 두껍게’가 왜 제대로 되지 않는지,행여 중산층이 더 얇아진 건 아닌지 심각하게 돌아볼 때다.
kimhg@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