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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세 골프소설 24] 제임스1세, 골프 중흥에 힘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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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통합 왕이 된 제임스 1세


[헤럴드경제 스포츠팀] 메리의 감금 생활은 너무나 길고 지리했다. 화려했던 여왕은 너무도 뚱뚱해져서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18년 영어의 세월 동안 메리는 수없이 탄원서를 제출하며 스코틀랜드로 보내달라고 엘리자베스에게 간청했다. 동시에 메리는 잉글랜드의 여왕 자리까지 넘보기 위해 스페인과 교황청에 비밀문서를 보내는 등 역모까지 여러 번 획책했다.

엘리자베스는 그런 메리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메리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왕실 혈통인 관계로 신하들이 왕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자체가 신성한 불가침에 대한 침해라며 대신들과 귀족들의 원성을 무마시켰다.

엘리자베스로서는 메리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같은 여자로서 질투도 많이 하면서 한 평생 견제의 대상이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많은 재능을 메리는 가지고 있다고 늘 생각했다. ‘남자들을 반하게 만드는 외모, 여성으로서의 카리스마, 수준급의 골프 솜씨, 큰 키에 날씬한 몸매, 박식한 지성, 그리고 무엇보다 왕위 계승의 적통자….’등등 이었다. 그런 메리를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지 않았다.

갇혀있던 메리는 결코 연금 상태를 면치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측근들을 은밀히 불러 다시 한번 반란을 획책했다. 병사 5백여명 만 모으면 야밤에 쿠데타를 성공시킬 수 있다고 늘 생각하던 터였다. 1586년 가톨릭 교도들이 메리가 연금된 성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메리와 음모를 꾸며 신교인 프로테스탄트였던 엘리자베스를 암살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행 전에 발각되어 버렸다.

메리가 연금 생활로 병들어가고 있을 즈음 스코틀랜드는 새 왕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 살 때 메리와 헤어졌지만 이미 장성해 20세의 성년이 된 메리 여왕의 아들은 스코틀랜드에서 제임스 6세로 이미 왕위에 올라 있었다. 어머니가 잉글랜드에 감금돼 있음을 알고 있었던 그였으나 제임스 6세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어머니가 잉글랜드 법정에서 구테타의 죄목으로 재판을 받는 데도 모른척했다. 제임스 6세의 생각은 차라리 어머니 메리가 잉글랜드에서 사형 당하기를 바랬다. 그런 뒤에 자식이 없는 엘리자베스까지 죽으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두 나라를 최초로 동시에 다스릴 수 있는 통합 영국의 왕이 될 수 있다는 야망 때문이었다. 권력에 대한 야욕과 욕망 때문에 어머니의 죽음을 방관한 것이었다.

메리의 쿠데타가 적발되자 엘리자베스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대를 앞서갔던 여성이면서 최초의 공식 여성골퍼였던 스코틀랜드 최초의 여왕. 한 시대를 풍미했던 메리는 그렇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다. 1587년 포더링헤이 성에서 메리의 사형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단두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목이 잘려 나가는 처형식 앞에서도 메리는 마지막 유언으로 “나는 죽이더라도 키우던 애견만큼은 살려달라”고 여왕답게 위엄있는 행동으로 일관했다. 길로틴의 칼날은 여지없이 아름답고 긴 메리의 목을 내리쳤다. 16세기 프랑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세 나라를 주무르며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던 여인. 국민들 사이에 ‘세기의 요부’로도 불렸던 메리 여왕은 44세의 나이에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메리의 임종을 거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단지 애견만이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메리는 그렇게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지만 16세기 골프의 전파에서만큼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프랑스에서 첫 남편과 골프 데이트를 하면서 사랑을 키울 정도로 골프를 사랑한 그녀였다. 프랑스 사관생도들로 하여금 캐디의 어원을 만들었던 주인공이었다.

두번째 남편이 죽은 뒤 3일도 지나지 않아 골프를 쳤다고 비난받은 여왕이었다. 그런 메리의 열정이 골프를 스코틀랜드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 대륙에 퍼지게 하는데 일조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메리는 그렇게 허망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뒤를 이은 아들 제임스 6세 겸 통합 제임스 1세는 어머니를 대신해 훗날 골프 전파에 많은 공을 세운다.

통합국왕 제임스1세, 골프 중흥에 힘쓰다
1603년부터 두 나라를 함께 통치하게 된 제임스를 시작으로 양국은 수백 년 증오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때부터 스코틀랜드, 웨일즈, 노던 아일랜드, 잉글랜드 등 4개국이 통합된 그레이트 브리튼이 탄생하면서 영국은 비로서 ‘해가지지 않은 나라’가 된다. 메리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 역시 골프광이었다. 그의 노력으로 잉글랜드도 1608년 최초의 골프 코스를 갖게 된다.

스코틀랜드에서의 공식적인 최초의 골프코스는 1552년에 만들어진 세인트 앤드루스의 올드코스로 되어있다. 제임스 6세는 최초로 스코틀랜드를 벗어난 지역에 골프장을 지었다. 런던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교외인 블랙히스에 당시로는 큰 코스였던 7홀짜리였다. 제임스 6세의 권장으로 영국은 국토 전역에 자유롭게 골프장을 지었고 많은 국민들이 골프를 즐겼다.

왕과 귀족들, 그리고 교회의 주교들은 잘 다듬어진 클럽과 비싼 페더리볼로 골프를 쳤다. 일반 서민들은 싼 클럽에 둥글게 다듬어진 공이지만 나무로 만든 볼로 역시 골프를 즐겼다. 골프를 치는 데 있어 빈부의 차이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됐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누구나가 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제임스 6세가 사망한 뒤 둘째 아들 찰스 1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그 역시 골프를 즐겼는데 기록에 의하면 페더리볼이 네덜런드에서 너무나 많이 수입된다고 해서 수입 금지령을 내렸던 왕이었다. 1642년 리스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고 있다가 아이리시의 침공이 있다는 전령의 전쟁 발발 서찰을 받은 사실로도 유명한 왕이었다.

세인트 앤드루스를 필두로 동쪽 해안 지대는 이미 조그만 마을에도 골프 코스가 우후죽순격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북으로는 몬트로즈에서 서쪽의 퍼스까지도 코스가 만들어졌다. 심지어 최 북단인 오크니섬에도 골프장이 있었다. 교회의 뒷 마당과 뜰은 모두 골프코스였다.

남쪽의 잉글랜드도 이에 가세했다. 사람들은 골프를 인생 최대의 목표로 세운 것처럼 골프를 쳤다. 세인트 앤드루스 등 스코틀랜드의 동해안이 골프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 지역이 링크스였기 때문이었다. 링크스란 바닷가와 붙어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 지형은 바닷물이 밀려오면서 모래가 퇴적돼 쌓이기도 하고 썰물 시에는 모래가 밀려나가 웅덩이가 생기기도 한다. 그 위에 짧은 이끼가 생겨나고 내륙쪽으로는 갈대가, 그리고 언덕위로 더욱 안쪽에는 풀밭이 생기게 되어 자연적으로 링크스 지역이 만들어지게 된다. 스코틀랜드의 동해안은 그런 곳이었다.

그런 곳은 농토로는 쓸모가 없었다. 엉켜붙은 채 자라지도 않고 땅바닥에 깔려 있는 이끼같은 잡초는 양들이 뜯어먹을 수도 없었다. 그저 빨래를 널거나 놀이를 하는 데만 적합했다. 세인트 앤드루스 사람들은 거기서 골프를 생각해 냈다. 비운의 메리 여왕을 대신해 아들 제임스 1세는 골프 전파에 많은 공을 들였다.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대신 골프의 전파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제임스 1세라는 골프의 개척자를 이 땅에 내려주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의 관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되어있다. 훗날 영국이 메리의 관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져오면서 엘리자베스 1세의 관과 함께 안치했다. 두사람은 살아서는 정적이었지만 죽어서는 양쪽으로 마주한 방에서 나란히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간직하고 있다.

두 여왕이 있는 런던으로 가기 위해서는 에딘버러 역에서 기차를 타야한다. 7, 8시간이 걸리는 여행이지만 마다할 수는 없다. 스코틀랜드의 일정을 마치는 대로 런던행 기차를 탈 것이다. 골프 역사에 대한 여정은 어차피 런던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메리 여왕의 일상을 확인하고 나오면서 제임스는 차를 인근의 공원 주차 지역에 놔둔 채 걸어서 에딘버러 시내로 향한다.

시내 언덕 위쪽에 자리잡은 오래됨 직한 식당 앞에 잠시 머문 제임스는 밖에 소개된 메뉴를 살핀 뒤 이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스코틀랜드의 고유 음식인 하기스를 먹지 않고 에딘버러를 떠날 수는 없었다. 우리나라의 대구같이 생긴 물고기인 해더크와 양의 내장을 썰어 오트밀과 함께 요리한 뒤 양의 위에 넣어서 튀긴 순대같은 하기스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즐기는 주식이었다.

미국 생활이 30년 가까운 제임스에게조차 생소했던 하기스였지만 검은 조끼를 입고 붉은 앞치마를 두른 웨이터에게 하기스를 주문했다. 맛은 그다지 나쁘지 않아 그런대로 먹을 만했지만 한국에서의 순대가 더 맛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색적인 점심을 마친 제임스는 세인트 앤드루스로 향한다. 영국골프박물관을 더 깊게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올드코스 18번 홀, R&A를 바라보며 오른쪽에 줄지어 있는, 현재는 올드코스를 찾는 여행객을 위한 호텔 등 B&B로 개조된 수백년 건물들 중 하나를 더불어 살펴야 한다. 알랜 로버트슨과 올드 톰 모리스의 클럽 제조공방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 필자 이인세 씨는 미주 중앙일보 출신의 골프 역사학자로 1998년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 우승을 현장 취재하는 등 오랜 세월 미국 골프 대회를 경험했으며 수많은 골프 기사를 썼고, 미국 앤틱골프협회 회원으로 남양주에 골프박물관을 세우기도 했다. 저서로는 <그린에서 세계를 품다>, <골프 600년의 비밀>이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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