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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7년전 미군은 헬기 띄웠는데…한국은 지금도 119만 찾았다”
해병대 총기사건으로 본 본지 기자 軍후송 체험기
헬기이송땐 30분 병원도착

차량으로 이동 수시간 걸려

1시간이내 수술 받았으면

박상병 생명 살렸을수도…



지난 4일 강화도 해병대 2사단 해안초소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 희생자 4명 가운데 박치현(21) 상병이 총상을 입은 후 2시간 35분이상 생명이 유지된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한국군 응급 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일부 외과 전문의들은 가슴에 총상을 입은 박 상병이 1시간 이내에 전문가에게 수술을 받았으면 회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 상병의 사망은 2011년 7월 한국군 응급 체계의 현주소로 27년전인 1984년 미군과 비교해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

기자는 1983년 3월부터 86년 6월까지 1사단 통신대대 가설병으로 복무했다. 1984년 화창한 5월 어느날 전화 가설작업을 위해 후임병들과 작업차에 올랐다. 운전병 옆에는 선입하사가 선탑하고 있었고 선임병으로 작업을 나간 기자는 트럭 맨 앞에 앉았다.

이날 작업은 제3땅굴 인근 부대였다. 통일촌을 지나 커브길에서 제3땅굴을 견학하고 나온 관광버스가 돌아 나오는 순간 운전병이 놀라 핸들을 틀지 못해 차는 논두렁 아래로 굴렀다. 정신을 잃었다. 잠시뒤 누가 흔들어 깨워 정신을 차렸으나 다시 혼절했다. 조금뒤 헬기 소리에 다시 정신이 들었다. 영어가 들렸다. 미군이 사고소식을 듣고 한국군 임에도 불구하고 헬기를 띄운 것이다.

미군은 사고자 중 중상을 입은것으로 판단된 2명을 헬기에 태워 서울 용산 원투원미군병원으로 향했다.

헬기가 도착하자 마자 대기하던 군의관이 나와서 응급처치를 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사고가 나고 채 40분 밖에 안걸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얼굴 전체가 피투성이가 돼 중상자로 판단 됐던 나는 떨어질때 충격으로 타박상과 얼굴에 긁힌 상처만 있을 뿐 외관과는 다르게 경상이었다. 응급처치를 마친 군의관은 심각한 상태가 아니라며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하라고 했다.

당시 국군통합병원은 화곡동에 있었다. 여기서 응급차로 국군통합병원에서 X-레이를 찍는 등 모든 검사를 받았다.

27년전에도 미군은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생명을 챙겼다. 헬기를 띄워 시간을 단축하고 또 가장 큰병원으로 먼저 보내 사고후 회생 가능성이 높은 두시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비록 자신들과 무관한 한국군일 지라도.

이와달리 이번에 사고를 당한 박치현 상병은 오전 11시 45분쯤 가슴에 총상을 입고 119구급차를 타고 강화읍 자그마한 민간병원으로 보내졌다. 이 병원은 수술할 시설도 의료진도 갖춰지지 않은 곳이다. 단지 수혈등 응급처치를 받고 오후 1시 50분쯤 헬기를 타고 오후 2시 25분에 국군수도병원에 도착했다. 사고후 가장 중요한 2시간 가까이를 허비한 것이다.

김포헬기장과 사건현장까지는 헬기로 15분 거리이고 사고 현장에서 경기도 성남시 분당의 국군수도병원까지는 90km로 시속 200km의 헬기로 이송하면 30분 정도 걸린다. 총 45분이면 수술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대해 군당국은 “헬기에 수혈등 의료장비가 없어 바로 부르지 않았다”며 “당시 박상병은 수혈이 가장 시급한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상병이 기자처럼 미군에 의해 후송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해병대 총기사건을 계기로 본 한국군 응급의료 체계는 아직도 생명보다는 사건 은폐ㆍ축소 그리고 장비와 예산을 탓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군 복무중인 최병진(가명)씨는“국가가 군인들의 희생만 강요한다면 누가 국가를 위해 젊음을 바칠수 있겠냐”고 말했다.

이진용 기자/jycaf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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