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민중항쟁 45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관련 법률 등 공식명칭은 민주화운동이지만 그 전개 과정을 들여다 보면 민중항쟁이란 이름이 걸맞은 것 같다. 광주에서는 5월 초부터 계엄 해제와 민주헌정 회복을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가 산발적으로 벌어졌다. 17일 자정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발표되고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의 잔혹행위에 이어 20일부터 발포가 자행됐다. 이에 격분한 지역민들이 경찰서 무기로 무장하고 시민군을 조직하고 나섰다.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 전남도청 진압까지 열흘간 항쟁을 이끌었던 기구들이 있었지만 계엄당국과의 협상을 거부하며 불굴의 결사 항전을 고수한 것은 기층민중 중심의 시민군이었다. 시민군은 끝까지 유혈진압에 대한 계엄당국의 사과와 계엄 해제를 요구했다.

5.18 시위대에 대한 공수부대의 잔혹행위는 진압 목적으로만 보기 어려웠다. 어떻게 군 통수권자와 지휘체계가 있는 정규군이 자국 국민의 시위에 대해 그렇게도 잔인하게 폭행할 수 있는지 지금도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5.18 연구자들 사이에는 내란집단이 일부러 시민들의 폭력 시위를 유발하려는 의도였다는 분석이 많았다. 군부가 나서야 한다는 여론을 조작하려는 저의가 깔려있었다는 것이다. 한강 작가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 할 수 있는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진압군의 잔혹행위에 대해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 “가능한 한 과격하게 진압하라는 명령이 있었다고 그가 말했다. 특별히 잔인하게 행동한 군인들에게는 상부에서 몇십만원씩 포상금이 내려왔다고 했다.” 여기서 ‘그’란 한강 작가가 만난 공수부대원의 동료였다.

광주에서 발포한 부대는 하나회 장성들이 여단장인 3공수와 11공수였다. 3공수는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20일 밤 11시 경 광주신역에서 시위대를 향해 M16을 발포했고 수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3공수는 12.12 군사반란 때 특공조를 투입해 직속 상관인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과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에게 M16을 난사한 무자비하고 패륜적인 작전으로 악명 높은 부대다.

21일 오후 1시10분 경 도청 앞 광장. 느닷없이 애국가가 방송되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됐다. 11공수 부대원들이 무릎 쏴 자세로 지휘관이 메가폰으로 사격중지 명령을 내릴 때까지 10분간 계속 발포했다. 애국가가 신호였고 사격중지 명령 때까지 발포했다는 점도 발포 명령자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5월21일 오후 광주 시내의 병원들은 복도까지 사망자와 부상자로 넘쳐났다.

5.18의 전개 과정은 3.1 만세 시위 당시 처음에 비폭력 평화시위를 했으나 일본 군경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두르자 지방 농민들이 농사도구를 들고 나서 대항했던 것과 동일하다. 3.1 만세 시위대는 일본 군경에 대항했고 5.18의 항거 대상은 하나회 내란집단이 지휘하는 진압군이었다. 3.1과 5.18은 이렇게 그 목표와 전개 과정이 정신사적으로 동일선상에 위치한다. 해방 후 첫 시민혁명인 4.19는 민주헌정을 수호하기 위한 역사였다. 5.18은 4.19와 민주헌정 수호 의지로 맞닿아 있다. 이런 점에서 5.18 정신은 3.1 및 4.19와 함께 헌법전문에 명기하는 것이 국민주권과 민주헌정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 부응하는 길이다.

김재홍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ESG실천국민연대 상임의장 (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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