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세계 부자 도시’ 순위에서 1년 새 19위에서 24위로 5계단 추락했다. 영국 컨설팅업체 헨리앤드파트너스와 자산 정보업체 뉴월드웰스가 발표한 50대 부자 도시 가운데 가장 큰 낙폭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백만장자 수는 전년 8만2500명에서 6만6000명으로 20% 가까이 줄었고, 억만장자 수도 195명에서 148명으로 감소했다. 10년간 누적 백만장자 증가율도 17%에 그쳐, 전년도 수치(28%)보다 크게 꺾였다. 한국의 자본 경쟁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번 조사는 부동산을 제외한 상장 주식, 현금, 암호화폐 등 유동자산 100만달러 이상 보유자를 집계한 것으로, 국제 금융시장에서 평가받는 자산 가치의 변동을 보여준다. 자산 이탈의 배경은 분명하다. 원화 가치의 급락이다. 지난해 원/달러 환율은 1288원에서 1472원으로 14%나 올랐다. 수출기업엔 유리할 수 있지만 자산가와 외국인 투자자에겐 치명적인 환차손 리스크다. 실제로 코스피는 지난해 원화 기준으로 10% 하락했지만, 달러 기준으론 20% 넘게 빠졌다. 원화 자산의 달러 환산 가치가 그만큼 줄어든 셈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산가들의 이탈이다. 한국은 지난해 백만장자 순유출 규모가 세계 4위(1200명)였다. 중국, 영국, 인도 다음이다. 단순한 세금 회피라기보다 정치 불안과 경제 정책의 혼선, 그에 따른 예측 불가능성이 누적된 결과로 봐야 한다. 계엄 사태와 시위, 정쟁에 빠진 정치권, 방향을 잃은 정책 기조가 자산가들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미래를 가늠할 수 없고 재산을 지킬 수 없다는 불안이 커지면 돈이 떠나는 건 당연하다.
무엇보다 정책의 예측 불가능성이 문제다. 최근 정부가 추진한 상속세 개편은 ‘부자 감세’ 낙인과 세수 감소 우려로 국회 통과가 지연돼 정책 신뢰에 금이 갔다. 더불어민주당이 밀어붙이는 상법 개정안도 논란이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로 바꾸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제약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노동시장 경직, 기업인에 대한 과도한 형사 책임, 규제 일변도도 한국 탈출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뒤집어 말하면 결국 예측 가능한 정책, 흔들리지 않는 법치, 안정된 사회 분위기가 세금 못지 않게 자본을 끌어들이는 요인이라는 얘기다. 실제 도쿄(3위), 싱가포르(4위)처럼 자본의 신뢰를 얻는 도시들은 모두 이 기본을 지켰다. 자산가의 이탈은 소비와 투자, 기업 활동 전반을 위축시키고 결국 성장 동력마저 떨어뜨리게 된다. 지금처럼 자산가와 기업을 둘러싼 부정적 인식과 규제 압박이 지속된다면 자본 이탈은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