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라는 말, 잊힌 지 오래
문화예술계의 ‘보릿고개’는 여전
문화 텔레스코프-문화·예술 현장편
※권혜수의 문화 텔레스코프-문화·예술 현장편에서는 생생한 공연 현장을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더불어 예술가들이 필드에서 겪는 어려움을 함께 고민하고 문화예술 공연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 문화예술계 ‘보릿고개’, 악순환을 끊어내야 한다
봄이 왔다, 겨울을 이겨낸 초목들의 물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보릿고개’란 말이 있다. 겨울이 지나 보리가 익기 전까지 식량이 부족했던, 우리 역사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이겨내는 생존의 처절한 시기였다. 예술은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했다. 민요에는 보릿고개의 어려움을 견디며 희망을 잃지 않으려 했던 서민들의 삶이 녹아 있고, 판소리에도 보릿고개를 겪으며 서로 돕는 공동체 정신이 강조되는 대목들이 존재한다. 보릿고개는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의 시기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위로받고 공동체의 힘을 확인했던 시대였다. 음악과 무용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역할을 했으며, 민속악과 전통 공연예술은 그 당시에도 중요한 위로의 수단이 되었다.
○ 현실의 ‘보릿고개’, 지원 체계의 한계와 예술인들의 고통
먹거리가 풍족한 지금의 시대에도 보릿고개가 있다. 바로 문화예술계다. 오늘날 문화예술계에 드리워진 ‘보릿고개’는 단순한 계절적, 경제적 어려움이 아니라, 공모사업 선정의 극심한 경쟁, 정부 회계제도와 지자체 지원의 불투명성, 지원 제도와 재원의 한계, 그리고 체계적 지원 부재로 인해 지속되는 악순환 그 자체다. 문화예술단체들은 대부분 12월에 공연을 마무리한다. 1월부터 3월까지, 일부 예술인들은 카페와 프랜차이즈 아르바이트, 택배 상하차와 같은 예술과 무관한 분야에서 정열을 쏟아내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이들은 극심한 경제적 압박 속에서도 문화예술에 대한 열망과 꿈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정부, 지자체가 공모하는 문화사업에 간절한 희망을 걸고 공모신청서를 신청한다. 그러나 경쟁률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처럼 가혹하다. 대부분의 지원 사업은 경쟁률이 높아, 예술인들이 몇 차례의 실패 끝에 겨우 소수만이 선정되는 현실을 드러낸다. 이렇듯 예술인들이 겪는 ‘신 보릿고개’는 단순히 개인의 생계 문제를 넘어, 우리 문화예술 생태계 전체의 지속 가능성과 창조적 활력을 위협하는 심각한 악순환을 낳고 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예술인들은 생존을 위한 타협 속에 묻혀 그 본연의 창작 열정을 잃어가고 있다. 이들이 겪는 고단한 현실은,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만이 아니라 체계적 지원의 부재와 불합리한 공모 시스템에서 기인한 구조적 문제도 포함되어 있음을 우리는 깊이 인식해야 한다.
○ 글로벌 경쟁과 융합의 시대, 문화예술의 새로운 도전
21세기는 정보와 창의력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동력이 되는 시대다. K-컬처가 전 세계를 강타하며 음악,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문화, 산업, 관광 분야는 여전히 각각 분리된 채 운영되고 있다. 문화와 산업이 융합될 때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는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여러 선진국이 실현하고 있는 전략이지만, 우리 문화예술계는 체계적이고 지속 가능한 지원 체계 부재로 인해 그 문을 두드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다면, 정부와 지자체의 문화예산 선정 비율은 얼마나 될까?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대표적 지원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4년도 문화예술진흥기금 공모사업 신청 건수와 선정 건수 분석 결과, 8245건(2496억9494만728원)의 신청 중 1066건(504억2930만원)이 선정되어 선정률은 12.93%에 불과해 치열하고 가혹한 경쟁률을 나타냈다.



한편, 예술단체와 예술인들이 집중되어 거주하는 서울의 서울문화재단 예술지원 2025년도 1차 통합공모 결과를 분석해 보았다. 역시 다르지 않았다. 전체 창작지원사업에서 약 5422건의 신청 중 608건이 선정되어 선정률은 11.2%에 불과했다. 이는 예술단체와 예술인들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소수에게만 기회가 돌아가는 구조적 현실을 여실히 드러내며, 지원 예산의 한계와 공모사업 중심의 지원 체계가 문화예술 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얼마나 가혹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청년예술지원에서는 전 장르를 아우르며 537건의 신청서 중 50건(9.3%)이 선정되었고, 원로예술지원은 330건 중 81건(24.5%)의 높은 선정률을 기록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경험 많고 명망 있는 예술단체들이 지원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예술창작 활동지원에서는 연극, 무용, 음악, 전통, 시각, 다원, 문학 등 다양한 장르에서 총 4555건의 신청 중 477건이 선정되어 10.5%의 평균 선정률을 보였다. 장르별로 보면, 무용과 전통 부문에서 17.2%와 17.3%의 높은 선정률이 나타났고, 시각 부문은 7.7%로 낮은 선정 비율을 기록했다. 이러한 차이는 각 장르의 지원 경쟁률 및 심사 기준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며, 문화예술 지원 정책의 세분화와 맞춤형 지원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이와 같은 낮은 선정률은 문화예술 지원 예산의 한정성과 단기 공모사업 중심의 지원 체계가 가져오는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이러한 현실 여건으로 인해 심사위원들은 한정된 예산 내에서 가능한 한 많은 예술 단체에 지원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지원금을 분산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는 결국 개별 단체에 제공되는 자금 규모가 감소하면서 공연 규모 축소와 질적 하락이라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특히, 통합공모 심사 과정에서 각 장르를 단 한 명의 심사위원이 담당하다 보니, 특정 대학이나, 장르에 편중된 선정 결과가 도출되는 불공정한 심사 폐단이 자주 발생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예산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예술 지원 정책의 근본적인 재검토와 체계 개선이 시급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자체와 전국 문화재단의 문화예산 출연금과 전체예산은 얼마나 될까?
2025년도 전국 17개 시도 문화재단 인구 대비 1인당 문화비용 금액을 비교해 보았다.

○ 지역 재정 역학과 문화 지원의 딜레마, 전국 17개 시도 문화예산 분석과 정책적 함의
한류가 전 세계에서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지금, 문화예술계는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 아래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으나, 그 지원 방식에는 심각한 지역 간 불균형이 존재한다.
서울시 재정포털과 서울시의회 예산자료에 따르면, 2025년도 서울시 예산은 약 48조 1144억원으로 확정되었으며, 이 중 순수 문화 분야에 배정된 금액은 약 7500억원 가량이다. 서울시는 문화예술재단 운영, 시립미술관·박물관, 공공 공연 및 전시, 문화사업 추진 등 다양한 항목에 예산을 편성하고 있으나, 그 방대한 총예산에도 불구하고 인구 규모에 비해 1인당 문화비용은 극히 낮은 편이다. 서울에 집중된 문화예술단체나 예술가들의 비율을 고려했을 때, 서울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의 지원사업 공모 경쟁은 더 치열하고 심각하기만 하다.
반면, 세종시문화관광재단과 제주문화예술재단은 인구는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시·도의 출연금과 재단 예산이 크게 편성되어, 1인당 지원액이 각각 약 8만77원과 7만2024원에 달한다. 이는 해당 지역들이 문화·관광 인프라 확충과 지역 브랜드 강화에 전략적으로 집중 투자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광주, 대전, 강원, 전남 등 중소규모 인구를 보유한 지역은 1인당 지원액이 4~5만원 내외로 나타나, 문화예술 활성화와 관광자원 개발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서울과 경기도는 전체예산 규모가 막대함에도 불구하고, 방대한 인구로 인해 1인당 문화비용이 각각 약 1만2233원과 7801원으로 낮게 산출되며, 이로 인해 서울 내 문화예술단체와 예술인들이 극심한 공모사업 경쟁에 시달리는 현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지역 간 격차는 단순한 재정 배분의 문제가 아니라, 각 지자체의 재정 여건, 문화정책 우선순위, 관광 및 지역 브랜드 전략 등 복합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소규모 지역은 제한된 인구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높은 1인당 지원 효과를 거두는 반면, 대도시는 다양한 문화사업과 광범위한 인프라 운영을 위해 자원을 분산시키는 특성을 보인다. 서울시의 경우, 순수 문화 분야 투자는 공공 문화 인프라와 민간·공공 협력이 결합한 다층적 지원 체계를 구축하여 시민의 문화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1인당 지원액만으로는 이러한 복합적 효과를 평가하기 어렵고, 대도시와 중소도시 간 지원 방식의 차이가 결국 문화예술의 지속 가능성과 창조성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 불균형의 그림자, 지역 문화 격차의 재고찰
문화 인프라 지역 불균형 해소 측면에서는 오랜 기간, 많은 정책 전문가들이 문화민주주의와 문화민주화 실현을 위해 지역 간 불균형 해소와 장르의 균등 배분을 위한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현실은 여전히 부족하고 미흡한 지원으로 ‘배고픈’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재정 지원의 한계뿐만 아니라, 문화정책의 방향성과 실행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결론적으로, 전국 17개 시도의 문화재단 예산 분석과 통합예술지원 공모 선정 현황은 우리 문화예술계가 당면한 ‘보릿고개’의 심각성과 그 해결을 위한 정책적 전환의 필요성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정부와 지자체는 단기적 공모사업 지원에 머무르지 않고,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재원 지원 및 운영체계를 마련하여 지역별 문화 투자 집중도와 규모의 경제 간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를 통해 전 국민이 균등하게 누릴 수 있는 문화 혜택과 함께, 우리 문화예술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지속 가능한 생태계로 도약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문화예술계 ‘보릿고개’, 그 어둠을 헤치고 빛을 찾자.
그렇다면 이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한 해법은 무엇일까? 단발적인 공모사업 지원이나 일시적 재정 지원만으로는 예술계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문화예술이 단순한 여가 활동이나 소비재가 아니라, 국민의 삶에 깊은 울림을 주는 중요한 사회적 자산임을 인식해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문화예술 분야의 기본예산을 증액·재편하고, 공모 선정 비율을 끌어올리는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지원 체계를 마련하여 예술인들이 안정적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산업과 연계할 수 있도록 민간 후원과 기업 스폰서, 세제 혜택 확대 등 다양한 재원 조달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특히 국내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해외 문화예술 시장의 적극적인 진출을 위한 문화교류, 문화 일자리 등 문화예술가 인력 교류 진출에 길을 열어주어야 할 것이다. 전 세계 34개국에서 국제 문화교류와 한국문화 확산의 전초기지로 운영하고 있는 재외 한국문화원‧문화홍보관 42개소에 예술가 인력 교류 전담 창구 개설과 플랫폼 구축을 건의한다.
더 나아가, 문화예술계의 ‘보릿고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창작 인프라와 교육·연구 체계의 근본적 개선이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공공 문화시설의 현대화와 디지털 전환을 통해 예술 자원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창작과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또한, 전문 예술 교육과 멘토링 프로그램을 강화하여 차세대 예술인들이 자율적이고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중요하다.
○ 문화예술단체 · 예술가의 자생력, 경쟁력 강화
한정된 국가 지원 예산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문화예술단체와 예술가들이 자생력과 경쟁력을 확보하는 다각도의 전략적 접근과 자구 노력 또한 동반되어야 한다. 문화예술단체의 자생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이 협력하는 종합적 지원 체계를 구축이 필수적이다. 우선, 단기적인 보조금에 의존하지 않고 기업 협찬, 크라우드펀딩, 자체 유료 콘텐츠와 이벤트 운영 등을 통한 다각적 수익 창출 모델을 개발하여 안정적인 재원 확보에 힘써야 한다. 또한, 공연, 전시, 교육 프로그램, 온라인 콘텐츠 등 다양한 사업 영역에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고 디지털 전환 적극 도입과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해 온라인 전시, 스트리밍 공연, 교육·체험 프로그램 등 혁신적인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소비자 접근성을 높이고, 빅데이터 기반 예산 관리와 효율적 경영 체계를 마련하여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 나아가, 실무 중심의 전문 교육 프로그램과 멘토링 시스템을 통해 내부 인재의 역량을 강화하고, 국내외 예술 커뮤니티와의 네트워킹을 활성화하여 정보와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도 중요하다. 더불어, 문화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부 및 지자체와 협력, 장기적인 지원 및 제도 개선을 이끌어내는 노력도 자생력 강화의 근간이 될 것이다.
○ 문화예술계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전환, 이제 공연장으로 공연 보러 가자!
예술인들이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도록, 우리 사회는 더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을 마련해야 한다. 그들이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예술을 통해 국민에게 위로와 영감을 전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의 문화예술이 단순한 소비재를 넘어 국민의 삶에 깊은 울림을 주는 가치 있는 자산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이 어려운 보릿고개를 함께 극복해 나가려면 국민과 민간에서의 적극적인 참여와 실천 또한 필요하다. 그 참여와 실천은, 단순히 예술인들에게 재정 지원을 넘어서 우리 사회 전반의 문화적 생명력을 회복하는 길이다. 민간 기업, 문화단체, 그리고 국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실천 방안을 적극적으로 실행하여야 한다. 지역 축제와 독립 예술 프로젝트에 대한 후원, 예술인과 문화단체를 위한 창업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그리고 공연 관람과 문화 체험을 실천하는 국민 참여 캠페인을 통해 직접적인 문화 소비와 창작의 활력을 불어넣자. 이제 우리가 관객으로, 후원자로 각자 공연장에 발을 들여놓고, 예술을 체험하며 그 가치를 직접 느낄 때, 우리 사회는 문화예술계의 어려움을 넘어 새로운 도약의 길을 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작은 실천들이 모여 문화예술의 미래를 견고히 할 것이다. 지금 여러분이 공연장으로 옮긴 한 걸음 한 걸음이 우리 모두의 문화적 자산을 지키고 빛내는 소중한 발판이 될 것이다.
문화·예술 현장편을 시작하며 우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체성이 담긴 국악, 가장 열악한 장르인 전통예술부터 공부하면서 공연장에서, 그리고 현장에서 만나고자 한다.
이제, 따스한 봄바람을 맞으며 공연장으로 가자!
글·사진 = 권혜수 우석대 교수
정리 = 박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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