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권에 이념논쟁이 벌어지면 새 판 짜기를 떠올리게 된다. 해방 후 새 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과정에서 좌우익 이념논쟁이 극심했다. 또한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 그런 정치적 환절기 같은 변화 모습들이 감지된다. 좌우익 이념은 본래 경제제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소득세와 상속세의 세율, 성장과 분배 및 복지의 우선순위, 기업 규제와 재벌 개혁의 속도, 자유경쟁 시장과 공정거래 정책 등이 정치이념과 맞닿아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현안 정책들의 국회 입법이 논의되는 가운데 “중도보수” 노선을 천명했다. 이에 권성동 원내대표를 위시한 국민의힘 의원들은 “위장하지 말고 중도보수를 실천하라”고 역공했다. 그러자 민주당 친명계의 좌장으로 통하는 정성호 의원은 “할 수만 있다면 중도보수 연대를 했으면 좋겠다”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양극단의 정치상황에서 전환하기 위한 연합정치를 언급한 것이다. 보건사회연구원의 국민 여론조사도 지난 해 사회갈등 체감지수가 역대 최고수준이며 진보-보수 간 갈등이 노사 간이나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등 여타 갈등보다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정치사에서 이념 논쟁의 대표적 무대는 해방 후 정부수립 과정이었다. 당시 미군정청은 1946년 7월 대한민국 독립정부의 이념적 정체성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표본집단 1만명에 응답자는 8476명으로 답변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응답자 중 54%가 자신을 좌우익에서 중립이라고 답변했고 우익 소속감으로 30%, 좌익은 16%로 나타났다. 당시 대중들이 좌우익의 분명한 입장보다도 스스로를 중간적 입장에 동일시하는 것이 대세였다. 새 정부의 이념문제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가운데 어느 체제를 좋아하는가”라는 질문에 70%가 사회주의, 자본주의 13%, 공산주의 10%, 모르겠다 7%의 답변 순위였다. 응답자들이 사회주의의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더라도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중간 이념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해방정국의 좌우익 지도자들에 대한 여론조사는 ‘선구’라는 잡지를 발행하던 ‘선구회’가 1945년 10월 실시했다. ‘양심적 지도자’를 묻는 질문에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등의 순위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내각 적임자를 선택하는 응답은 달랐다. 대통령 적임자로 이승만 44%, 김구 30%, 여운형 8%, 무기록 18%였다. 응답자가 정당과 단체 소속 유지인사들이었고 이들은 현실적으로 남한을 점령한 미국 영향과 국제정치적 수완 등을 고려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해방정국의 주요 인물들을 이념적 좌표로 분류한다면 이승만 김구는 보수, 박헌영 이관술은 진보, 여운형 장건상 김원봉은 중도진보, 그리고 중도보수로 김규식·조소앙·백관수·김병로 등을 꼽을 수 있다.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위원회까지 꾸려 연합정치를 도모했던 중도 세력이 크게 역할하지 못한 것은 대중적 기반을 흡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에서 자신을 중도라고 답변한 응답자가 54%에 이르렀음에도 이를 현실적 정치자원으로 조직화하지 못한 것이 한계였다. 지금의 양극단 정치상황에서 중도 노선과 연합정치가 과연 활동 공간을 확장할 수 있을지 자못 주목된다.
김재홍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ESG실천국민연대 상임의장 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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