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지난달 28일 백악관 정상회담이 파국으로 끝난 가운데 유럽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 정상 15명이 2일 영국 런던에 집결해 후속 대책을 논의했다. 자유 진영을 이끌어왔던 미국 대통령이, 국제법을 위반한 침략국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방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향해 “당신에게는 카드가 없다”며 ‘안전보장 없는 종전협정’에 사인할 것을 윽박지르고 백악관에서 내쫓듯 돌려보내자 유럽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트럼프는 급기야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를 전면 중지할 것을 지시한 것으로 3일 전해졌다. 초강경 대응으로 동맹이나 우방을 길들이려는 포석이다. CNN은 “젤렌스키와 트럼프 설전은 트럼프가 크렘린궁(러시아 대통령실)과 긴밀하게 밀착하면서 러시아로 피벗(중심축 전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급격한 변화 속에 유럽이 고립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번지는 중”이라고 전했다.
유럽 주요 정상들은 이날 방위비 증액을 강조하며 유럽이 주도하는 ‘의지의 연합’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의지의 연합은 이라크 전쟁 당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자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동맹국들을 지칭한 표현이다. 유럽이 안보 강화를 내세우는 가운데 미국이 군사 지원에서 손을 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정상회의에선 유럽이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을 지속하며, 우크라이나를 배제하는 평화 협상엔 반대한다는 뜻을 모았다. 또 영국·프랑스가 주도하는 새로운 우크라이나 안보 계획도 추진키로 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유럽은 급히 재무장해야 한다”며 6일 EU 정상회의에서 포괄적인 계획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 자체 핵우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 자강론을 부른 미·러 밀착은 한국 안보에도 큰 영향을 끼칠 변수다. 특히 북한이 러시아에 파병한 지금의 상황을 감안하면 북핵 등 대북 협상 과정에 러시아가 끼어들고 한국이 배제될 위험도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미국이 중국 견제에 총력을 쏟고 있는 상황이라 트럼프가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를 무시하긴 어렵다는 관측도 있지만 큰 기대는 말아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엘브리지 콜비 국방부 정책 차관은 대중 견제의 핵심 우호국으로 일본·호주·인도를 꼽고, 한국은 ‘담장 위에 서 있는 존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처지를 보면 미국에 의존하는 약한 동맹국은 국제규범 위반을 일삼는 패권국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트럼프의 미국을 상대하려면 우리만의 안보 카드를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