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배경 청소년 ‘무기한 방치’

모텔·쪽방 등 홀로 거주 대다수

잇단 정신질환…“전문상담 필요”

서울 구로구 오류동의 빽빽한 아파트 단지 사이에는 운동장 없는 학교가 하나 있다. 12년 전 설립된 다문화 대안학교, ‘지구촌학교’다. 한국이 다문화 국가에 가까워지며 이곳 전교생도 3배 가까이 늘었다. 대부분 가족이 없거나 국적이 없거나 집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 ‘금쪽이’가 된다. 본격적인 외국인 노동자 시대, 청소년 세대에 드리운 그늘이다. 이 같은 현실을 조명하기 위해 헤럴드경제는 지구촌학교 학생들과 학교의 이야기를 다뤄봤다. 참고로, 기사에 실린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있는 다문화 대안학교 지구촌학교(위쪽 사진). 지구촌학교 같은 다문화 대안학교 학생 대부분은 가족·국적·집이 없이 방치돼 ‘금쪽이’가 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후원도 열악하다. 오른쪽 사진은 지구촌학교 복도 벽이 갈라져 있는 모습. 박혜원 기자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있는 다문화 대안학교 지구촌학교(위쪽 사진). 지구촌학교 같은 다문화 대안학교 학생 대부분은 가족·국적·집이 없이 방치돼 ‘금쪽이’가 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후원도 열악하다. 오른쪽 사진은 지구촌학교 복도 벽이 갈라져 있는 모습. 박혜원 기자

중국에서 온 유리(14)의 핸드폰에는 아침마다 스무 통씩 부재중 전화가 찍힌다. 유리는 지구촌학교로 등교할 때, 대개 점심 시간에 맞춰 나온다. 그나마 입맛에 맞는 김치만 식판에 가득 담는다. 박지혜 지구촌학교 교감은 “항상 김치를 산처럼 퍼서 우걱우걱 먹는데 정작 몸은 비쩍 말랐다”고 했다.

유리는 이혼 가정이라 엄마는 없고 아빠와 경기 안양시의 한 빌라에서 산다. 하지만 아빠는 일을 하느라 얼굴을 잘 비추지 않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박 교감은 급식이 유일한 끼니인 유리를 걱정해 청소년 쉼터를 알아봐줄 계획이다. 유리는 처음엔 쉼터 제안을 거절했지만 며칠 뒤 교감에게 “거기 밥은 뭐가 나와요”라고 물어왔다.

▶전교생 300명, 절반이 우울증 학교=이주배경 학생 중에는 사실상 방치돼 있는 이들이 많다. 정신 건강도 위험하다. 외국인 취업자나 국제 결혼이 매년 늘고 있는 가운데 정작 부모와 함께 한국에 들어온 자녀 세대는 대개 각 가정에서 방임이나 학대에 노출돼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교육 현장에서는 이런 환경이 학생에게 우울증 등 정신 질환으로 이어져도 손 쓸 방법이 없다는 호소가 나온다.

지구촌학교는 교육비를 전혀 받지 않고 기부금만으로 운영된다. 재작년에 학교가 정식 인가를 받으면서 학생이 부쩍 늘었다. 올해 기준 전교생 수는 277명으로, 2년 전(90명)에 비해 3배 가까이 불었다. 학생들 출신국은 총 22개국에 달한다. 중국(137명)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베트남(23명) ▷몽골(20명) ▷미얀마(10명) 등 순이었다.

교육 프로그램을 짜거나 기업에 후원을 요청하는 등 학교 운영으로도 바쁘지만, 박 교감이 특히 시간을 많이 들이는 일은 따로 있다. 학생들에게 주기적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하는 일이다. 박 교감은 “어림잡아 절반은 우울증·불안·분노장애 진단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이는 대부분 학생이 방치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박 교감의 이야기다. 이곳 학생 중에는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온 자녀가 많다. 그리고 절반 이상이 혼자 살고 있다. 부모는 주로 지방에 집중된 일터에 머물고 자녀에겐 최소한의 거처만 마련해주는 경우가 많다.

▶연락 닿은 아빠 “걔는 버린 자식”=유리도 이런 사례다. 박 교감은 지난해 수학여행을 계기로 유리를 특별히 살피게 됐다. 전교생이 떠나는 수학여행 당일 유리 혼자 학교로 등교하면서다. 가족 중에 아무도 유리의 등교를 챙기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1년 결석만 60일이 넘는 탓에 수학여행 일정조차 몰랐다.

학교에 좀처럼 얼굴을 보이지 않으니 어울려 지내는 친구도 없다. 박 교감은 “집에 대부분 혼자 있고 용돈도 못 받는 상태인 것 같다”며 “밤새 게임을 하고 늦게 자는 생활이 반복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리는 여러 학교를 전전하며 자퇴하기를 반복하다 그나마 지구촌학교를 3년째 다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 출신인 베오(18)는 경기 부천시의 한 모텔에 살았다. 베오에게 이곳을 얻어준 아빠는 지방 건설 현장을 돌며 일을 하고 있다. 박 교감이 나서서 베오를 쉼터로 보냈다. 쉼터 체류 기간이 끝났을 때엔 박 교감이 베오 아빠에게 수없이 전화를 걸어 겨우 연락이 닿았다. “버린 자식이니 상관하지 말라”는 아빠를 박 교감이 설득해 베오에게 다시 고시원을 얻어주게끔 했다.

베오에겐 분노장애가 두드러진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교사와 언성을 높이며 싸운다. 한번은 친구와 다툼이 붙은 후 커터칼을 들고 뒤쫓아가는 모습을 박 교감이 목격하기도 했다.

▶자녀 버리고 귀국하는 부모들=박 교감은 “너무 냄새가 나서 들어갈 수도 없었다”며 수리(18)가 조부모와 함께 사는 집을 찾았을 때를 회상했다. 2년 전 수리의 아빠는 수리를 한국에 조부모와 두고 갔다. 조부모는 거동조차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따라오든지 말든지 해라”는 말에 수리는 차라리 남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돈이 없어 반찬 없이 맨밥으로 끼니를 때웠던 게 수리에게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다. 박 교감은 궁여지책으로 조부모를 방임 혐의로 고발한 뒤 수리를 쉼터로 옮겼다. 수리는 다음달 쉼터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이 끝나지만, 아직 새로운 거처를 찾지 못했다.

수리는 자살까지 시도한 적이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 꾸준히 상담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좀처럼 주변에 마음을 열지 않는다. 박 교감은 “속내를 한번 이야기하고 나면 상담을 거부한다”며 한숨을 쉬었다.

수리와 같이 외국인 노동자로 들어왔다 자녀를 한국에 두고 홀로 본국으로 가는 사례는 흔하다. 이런 자녀 중 몇몇은 학교를 졸업한 뒤 방황하다 범죄에 빠지기도 한다. 박 교감은 얼마 전 졸업생 학교생활기록부를 요청하는 경찰 연락을 받았다. 보이스피싱 범죄에서 자금 운반책에 가담했다는 것이다.

국제 결혼을 한 엄마를 따라 왔다 한국에서 가정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미지(19)는 한국인 아빠에게 오랜 시간 폭력을 당해왔지만, 말을 하지 못하다 교사가 멍 자국을 발견하고 나서야 이야기를 털어놨다. 학교 측에서 몇 차례 아동학대 신고를 했지만 “베트남으로 돌려보내겠다”라는 협박만 더 늘었다.

이 밖에 드러내놓고 학대를 당하지 않더라도 본국에서 방치되다 한국에서도 같은 상황이 이어지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것이 지구촌학교 교사들의 이야기다.

▶“정신질환에 취약…전문상담 체계 마련해야”=전문가들은 이주 배경 학생들은 정신 질환에 취약한 조건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혜미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청소년기에 우울 수준이 높아질 수 있는 요인 중 가장 주요한 것이 급격한 거주 환경 변화”라며 “부모가 대체로 경제활동에 많은 시간을 쓰다 보니 자녀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며 악화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실제로 전교생 100여 명 규모인 또 다른 서울 소재 한 다문화 학교가 학기 초 진행한 정서진단에선 신입생 절반가량이 ‘주의관찰’이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실제 이 학교에서는 학생 자해 등 돌발 행동이 수시로 발생한다.

치료가 끝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박 교감이 안부차 찾았던 베오의 고시원에는 먹지 않은 약이 봉지째 남아 있었다. 이마저도 본인이나 부모가 치료를 거절하다면 가로막힌다.

김 교수는 “국내에 이주배경 청소년의 문화적 맥락과 특성을 이해하면서 진료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전문적 역량을 갖춘 상담자 양성, 이주배경 청소년을 위한 상담 지원 서비스 체계도 별도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혜원·안효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