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어느 금요일 밤,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공연장. 무대의 막이 내리자 관객들은 “브라바!”를 외치며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방금 이탈리아 밀라노에서의 마지막 무대를 마친 이 공연의 제목은 ‘La Vegetariana(라 베제타리아나)’다. 한국어로 채식주의자. 대한민국 최초 노벨문학상의 주인공, 한강 작가의 소설이 원작이다.

소설 채식주의자가 연극화되어 무대에 올라간 것은 전세계에서 이탈리아가 처음이다. 연극 채식주의자는 로마에서 밀라노를 거쳐 토리노까지, 이탈리아 전국 순회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흔히 서양이 동양보다 개방적일 것이라 여기지만, 유럽의 공연예술 시장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전세계 뮤지컬의 메카인 영국 런던의 웨스트엔드는 오랜 기간 검증받은, 이른바 전통적인 공연들 위주의 정체된 시장에 가깝다. 16세기 오페라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역시 자국의 유서 깊은 공연에 가지는 자부심이 대단해, 베로나 오페라 축제에서는 여전히 1800년대에 작곡된 아이다와 라 트라비아타와 같은 작품들이 공연되고 있다.

이렇게 보수적인 이탈리아 공연계에 한국 문학을 원작으로 하는 공연이 올라왔다니, 이는 단순한 공연을 넘어 한국 문학과 공연예술의 새로운 도약을 상징하는 사건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유럽 공연예술 시장은 한국 공연 작품을 향해 느리지만 확실하게 문을 열고 있다. 국내 창작 뮤지컬 “마리퀴리”는 지난 2024년 두 달 간의 런던 공연 이후 2026년 폴란드 라이선스 공연을 목표로 유럽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 다른 국내 창작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는 내년 4월 런던 오프웨스트엔드에서 첫 공연을 올릴 예정이다.

대한민국은 공연 시장에서 상당히 입지적인 국가다. 대한민국 뮤지컬 시장은 2023년 기준 연 4590억원 규모로, 미국·영국·일본에 뒤이어 세계 4위의 시장 규모를 가졌다. 또한 상당한 콘텐츠 파워를 가진 수출국이기도 한데, 초기에 주로 해외 라이선스 작품을 수입하던 시기를 빠르게 벗어나 이제는 자체 창작 IP를 세계 각국에 수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국인의 정서로 창작된 대본이 아시아 외의 지역에서 관중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K뮤지컬의 해외 진출 초기에서부터 이어져 왔다. 하지만 글로벌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플랫폼을 통해 한국 드라마가 전세계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지금, 한국의 스토리텔링이 가지는 힘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전세계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켜 지구 반대편 이탈리아에서 전국 순회 공연을 매진시킨 채식주의자가 바로 그 예시다.

K트렌드는 음악·영화·드라마 등 개별 콘텐츠를 넘어 각 콘텐츠들이 담고 있는 스토리 그 자체로 확장되고 있다. 스토리를 가장 풍부하게 전달할 수 있는 콘텐츠 중 하나가 공연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 공연예술 콘텐츠가 초기 K콘텐츠가 그랬던 것처럼 조금씩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K팝·K무비·K드라마 이후 세계로 수출될 K콘텐츠는 공연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시작에 한국의 스토리에 누구보다 열려있는 국가, 이탈리아가 있을 수 있겠다.

김한솔 코트라 밀라노 무역관 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