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나 줘서, 깨어나 줘서, 무사히 퇴원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지난달 16일 오후 3시35분. 한 30대 남성이 건물 38층 높이에서 22층으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무려 16층이나 추락한 사고였다.
그는 ‘골든 타임’만 생각했다. 눈이 내리는 기상악화에도, 지체하지 않고 소방청에서 운영하는 의사 탑승 헬리콥터(119 Heli-EMS)에 올랐다.
환자는 쇼크 상태에 두부, 흉부, 복부 등 각종 장기와 사지에 다발성 중증 외상을 입었다. 생존조차 힘들어보였다. 그러나 의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틀에 걸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환자 의식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의료진 모두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렸다.
간절한 마음이 닿은 것일까, 환자는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두고 눈을 떴다. ‘기적’ 같은 생환이었다.
환자는 사고 23일 만인 지난 8일, 밝은 모습으로 퇴원했다. 이 ‘크리스마스이브의 기적’의 뒤에는 신속한 이송 시스템과 병원 간 협업, 헌신적인 의료진의 노력이라는 3박자가 있었다.
기상악화에도…사고 100분 만에 외상센터로
이 기적을 만든 주인공은 김마루 가톨릭대 의정부성모병원 권역외상센터 외상외과 교수다. 그는 헤럴드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미국 외과 학회에서도 3m 이상에서 추락한 경우 외상센터에서의 진료를 우선하라고 하는데, 3m도 아니고 38층에서 추락한 환자라면 신체에 엄청 큰 충격이 가해졌을 것이고, 이는 중증 외상의 가능성을 의미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환자는 아파트 건설 현장 38층에서 작업 중이던 A 씨(38)였다. 추락 사고로 22층에 설치된 안전망에 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구급대가 가까운 파주의료원으로 옮겼으나, 상태는 위중했다.
‘손상 중증도 점수’(ISS)가 15점 이상이면 중증외상환자로 분류된다. A 씨의 경우 29점이었을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그만큼 생존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뜻이다. 파주의료원은 응급조치와 함께 ‘의사 탑승 소방헬기’(Heli-EMS)를 요청했다.
김 교수는 “권역외상센터는 중증 외상 환자를 진료하는 곳”이라며 “다만 이 중증 외상의 결정은 모든 검사가 끝난 뒤 하는 최종 진단이고, 외상센터에서 환자 수용을 결정하는 데에는 사고 기전을 중요하게 본다”고 밝혔다.
날은 흐리고 눈까지 내렸다. 기상 상황이 좋지 않으면 헬기가 많이 흔들려 기내에서 처치도 어렵다. 의료진은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다. 김 교수는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주저 없이 헬기에 올랐다.
김 교수는 “소방헬기로 여러 차례 함께 출동하고 있기 때문에 환자 이송은 수월하게 진행돼 헬기 이송 결정에서부터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50분이 채 안 걸렸다”며 “그 사이에 환자가 파주의료원에 들러 응급처치까지 받고 온 것을 생각하면, 일사천리로 진행된 셈”이라고 설명했다.
신속한 헬기 이송 결정과 실행, 병원 간 긴밀한 협력 덕분에 골든타임 내에 응급수술과 치료가 가능했고, 집중적인 중환자실 치료로 이어졌다.
신속 이송·병원 협업·의료 협진 ‘삼박자’
A 씨는 사고 발생 1시간40분 만에 의정부성모병원 권역외상센터에 도착했다. 다발성 중증외상 환자의 경우 여러 과의 협진이 필수적이었다.
김 교수는 “지혈을 위한 출혈 부위 봉합과 함께 바로 지혈제, 수혈, 수액 투여 등 소생을 위한 중환자실 치료에 들어갔다”며 “부러진 뼈가 피부 밖으로 드러날 정도로 하지의 손상이 심했기 때문에 중환자실 치료를 하면서 쇼크에서 안정됨과 동시에 정형외과에서 응급수술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수술이 잘 끝났지만 A 씨는 한동안 의식을 찾지 못했다. 모두의 간절한 마음이 며칠 동안 이어졌고, 환자는 크리스마스를 하루 앞둔 24일 의식을 회복했다.
김 교수는 “환자를 진료하면서 ‘진인사대천명’이라는 생각을 많이 떠올린다”라며 “신이 아닌 인간으로서 결과까지 완벽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처치를 다 하는 것이 제 일이라고, 처치를 못 해서 돌아가시는 환자는 없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중환자를 진료하면서 부족한 부분이나 과한 부분은 없는지 항상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다”며 “빠짐없이 해야 할 처치를 한 끝에 환자는 차차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의식을 차린 환자에게 그저 살아나 줘서, 깨어나 줘서 감사할 뿐이었다. 김 교수는 “어머니께서 매사에 감사하며 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며 “저도 항상 그런 기도를 많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궂은 날씨에 위험한 환경에서도 환자를 위해 함께 고생해 주시는 소방 119 대원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인력 부족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함께 환자 진료에 힘써 주시는 정형외과, 성형외과, 신경외과, 안과, 마취과 등 다른 과 선생님들께도 감사 드린다”고 했다.
경기 북부지역 중증외상환자를 담당하는 의정부성모병원 권역외상센터는 24시간, 365일 돌아간다. 늘 긴장 속에서, 바쁘게 움직이지만 ‘사람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한다는 보람이 더 크다. 힘들고 고되지만 10년간 외상센터를 지키고 있는 이유다.
김 교수는 “10년간 이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과에서 여전히 막내”라며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사람이 힘들고, 어려운 곳을 피해 편하고, 돈을 많이 버는 분야로 몰리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고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라 할 수도 있다”면서도 “‘사람 살리는 곳’의 근무 여건이 개선돼 갈 곳이 없어서, 낙수 효과로, 하는 수 없이 지원하는 곳이 아니라 뜻있는 젊은 의사들이 자연스럽게 몰릴 수 있도록 정부의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