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국내 첨단기업 443곳 중 53.7%가 경쟁국보다 규제가 과도하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배터리(58.2%), 바이오(56.4%), 반도체(54.9%) 기업들은 규제 체감 정도가 더 높았다. 응답 기업의 72.9%는 규제를 이행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한다. 이행이 수월하다고 답한 기업은 고작 2.7%였다. 기업이 신기술 개발에 집중하기보다 규제에 대응하느라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는 얘기다.
기업들은 규제 이행의 어려움으로 ‘규제가 너무 많다’(32.8%)는 점을 가장 큰 문제로 지적했고, ‘준수해야 할 규제 기준이 높아서’(23.1%), ‘자료 제출 부담이 과도해서’(21.8%) 등을 들었다. 특히 연구개발(R&D)과 인증·검사 관련 ‘기술규제’(29.6%)를 개선해야 할 최우선으로 꼽은 점은 지나치기 어렵다. R&D와 같은 중요 분야에서 발목을 잡는 규제가 많으면 애초 혁신이 일어나기 힘들다. 인증·검사 관련 ‘기술규제’도 마찬가지다. 한 바이오기업이 개발한 인공지능(AI) 기반 혈당 측정 및 진단 채혈기의 경우 의료기기와 진단 의료기기가 합쳐진 복합제품으로 판단 받아 중복 인증을 받게 됐다고 한다. 기업들이 기껏 혁신 제품을 개발해도 과도한 서류 제출과 복잡한 절차로 제때 출시를 못할 수 있는 것이다.
‘인력 규제’(17.8%)도 주요 개선 사항으로 꼽았는데, 특히 주 52시간제 지적이 많다. R&D 인력의 효율적 운용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만 TSMC가 삼성전자에 14나노 공정이 뒤처지자 R&D 연구인력 400여 명을 24시간 3교대 체제로 운영해 기술개발에 총력을 기울인 사례는 잘 알려져 있다. 주52시간제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는 우리와 대비된다. 기술 패러다임이 급변하는 때에 첨단산업은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다. 반도체, 인공지능, 바이오 등 국가 간 경쟁은 전쟁이나 다름없다. 국가가 할 수 있는 자원을 총동원해 지원하는 게 새 기준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획일적인 규제와 경직된 제도로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반도체업계가 주 52시간 적용 예외를 요구하고 있지만, 국회는 여전히 외면하고 있다. AI기본법 등 110여건의 비쟁점 민생 법안을 처리하면서 가장 시급한 반도체특별법은 뺐다. 국민의힘이 주 52시간제 적용 제외를 담은 특별법을 발의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이 이를 근로기준법 특례 조항으로 대체하자고 해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결과다. 첨단산업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기술 발전 속도가 빨라 조금의 지체도 허용하지 않는다. 정치적 계산을 멈추고 기업들의 호소에 귀기울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