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판소리는 지루하다? 편견 깨부순 소리극 20년
판소리는 어렵고 지루하는 편견 도전장
민간 소리극 단체의 20년 창작세계
타루·바닥소리·판소리 트래블러 한 자리
‘2023 남산소리극축제’를 통해 20년간 소리극 창작을 이어온 소리극 단체 ‘창작하는 타루’, ‘판소리 공장 바닥소리’와 이들의 뒤를 잇는 신진 단체 ‘판소리 트래블러 KA2729’가 뭉쳤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0여년 전, 지금으로 치면 그 시대의 ‘MZ세대’였을 2030 젊은 소리꾼들의 수상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새로운 창작’에 대한 욕구가 물 밑에서 요동쳤고, ‘박제된 전통’으로 치부되는 뿌리깊은 편견이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판소리는 고루하고 지루하다”, “판소리는 어렵다”는 선입견은 이들의 창작 동력이었는지 모르겠다. 든든한 울타리가 아닌 야생에서 자생한 소리극 단체들은 지난 20년간 꺾이지 않고 다양한 시도와 실험을 이어왔다. 2001년 소리극 단체 ‘창작하는 타루’가 등장했고, 이듬해 ‘판소리 공장 바닥소리’가 나왔다. 이들은 서로 다른 소리극을 만들며, 경쟁하고 연대하며 함께 성장했다. 이들의 시간을 이어받아 신진 단체 ‘판소리 트래블러 KA2729’가 태어났다. 세 단체가 한 자리에 모였다. ‘2023 남산소리극축제’를 통해서다.

최용석 ‘2023 남산소리극축제’ 예술감독은 “20여년간 민간에서 소리에 대한 고민을 해온 단체와 이들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청년 단체를 초대해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소리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갖고자 했다”고 말했다.

세 단체는 이번 축제 기간 동안 공연을 통해 관객과 만났고, 다양한 워크숍으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바닥소리 작품으로 만나는 판소리 작창의 세계’, ‘타루의 소리극 창작 워크숍’, ‘반상회-할 말 있는 소리극 동네 사람들’ 등이다. 축제 기간 동안 이어진 이 자리는 소리극 단체들의 치열한 창작과정을 돌아보면서도, 타 장르의 창작자들과 교류하며 장르의 장벽을 허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소리꾼이 곧 창작자”…다양한 소리극의 탄생 배경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선 사람들의 투쟁(‘체공녀 강주룡’)을 그렸고, 이질적인 두 존재를 통한 공존(‘아리랑 그리랑’)을 담았다. 조선 최고의 명창(‘진채선’)부터 로미오와 줄리엣(‘판소리, 애플 그린을 먹다’)까지 ‘민간의 소리극’은 일찌감치 소재와 스토리의 확장을 선도했다. 소리극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서양의 고전과 희비극을 과감하게 가져왔고, 세대를 아우르는 동화는 물론 고전, 현대 소설을 통해 신선한 창작세계를 구축했다. 척박한 환경에서 소리극이 꽃 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꾸준한 창작 욕구 때문이다.

바닥소리와 타루의 창작 세계를 엿보는 것은 두 단체의 지난 20년을 ‘빨리감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두 단체의 공통점이 있다. 소리꾼 스스로가 창작자로 자리한다는 것이다. 단지 소리극에 출연해 소리와 연기를 하는 ‘소리극 배우’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모두가 작창(作唱, 소리를 짓는 일)에 참여해 “창작자로의 성장”(바닥소리 정지혜 대표)을 도모한다. 이러한 참여가 소리극 성장의 배경이었던 셈이다.

창작은 여러 방식에서 나온다. 작품과 상황마다 달라지겠지만 타루의 창작 방식이 놀이에 가깝다면, 바닥소리는 연구에 근접했다.

‘2023 남산소리극축제’의 일환으로 진행된 ‘타루의 소리극 창작 워크숍’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타루는 단원들이 모여 몸풀기에서 시작해 즉흥과 게임을 겸하는 활동으로 새로운 창작을 시작한다. 남산소리극축제의 워크숍에선 10여명의 참가자들이 타루의 이러한 창작 과정을 공유했다. ‘태양 경배 자세’로 몸을 푼 뒤 ‘달팽이 달달달’ 게임, ‘감자’ 게임 등을 이어가는 색다른 수업을 진행했다. 정종임 타루 대표는 “판소리를 바탕으로 창작을 하지만, 다양한 감각과 경험을 통해 튀어나오는 창의력을 창작으로 승화한다”고 말했다. 동화책을 읽으며 즉흥적으로 작창하는 방식은 고난도 작업이라 여겨진 작창에 보다 쉽게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바닥소리의 작창은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작창의 첫 순서는 대본 분석. 그런 다음 대본의 의미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장단을 정하고, 멜로디를 입히는 순서로 작창을 이어간다. 바닥소리 소리꾼 이승우는 “장단을 결정할 땐 장면의 역동성을 많이 따진다”며 “하지만 역동적인 장면이라고 빠른 장단을 쓰는 단순한 접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장단의 조화도 고려한다”고 말했다. 바닥소리의 작창에선 온전히 소리꾼의 창작을 존중하고, 이들의 해석을 신뢰한다. 특히 바닥소리의 작품은 ‘밑바닥 사람들’의 억압된 이야기를 꺼내는 만큼 작창 역시 “인물이 성격과 작품의 특징에 집중”(정지혜 대표) 한다.

서로 다른 민간 단체들의 꾸준한 시도로 태어난 소리극의 다양성은 그것 자체로 지금 우리 시대 소리극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 타루의 김희정 PD는 “민간단체들이 저마다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팀을 이끌어와 소리극이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소리꾼들도 창작할 줄 아는 노하우가 생기게 됐다”며 “각기 다른 단체의 다양성, 이를 바탕으로 한 여러 색깔이 지금의 창작 판소리의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소리극에 대한 관심이 높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국립창극단이 창극(소리극)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민간 단체들이 다양한 소리극을 내놓으며 저변을 넓히고 있다. 하지만 대중적 인지도는 여전히 부족하다.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경계 넓히는 소리극…대중적 인지도는 물음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소리극에 대한 관심이 높다. 부르는 이름은 다르지만, 국립창극단이 창극(소리극)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민간 단체들이 다양한 소리극을 내놓으며 저변을 넓히고 있다. 남산소리극축제를 통해선 소리극을 향한 타장르 예술가들의 지지와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 단체와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들이 어우러지는 자리로 마련된 ‘반상회-할 말 있는 소리극 동네 사람들’에선 소리극 장르로의 진입을 시도하는 타 장르 예술가들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도 마련됐다. 이 자리에선 비전공자로서의 장르 진입 우려, 작창부터 대본 작업에 이르기까지 소리극 창작 노하우에 대한 고민이 나왔다. 더불어 ‘판소리와 소리극의 본질’을 고찰하는 시간도 가졌다.

소리극을 만드는 주체들은 “소리극의 본질은 소리꾼과 이야기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리극을 만들어가는 소리꾼들의 “목소리와 창법”은 다른 장르의 극과 구별되는 지점이라는 공통의 의견이 나왔다. 특히 소리꾼들은 “수많은 감정을 목소리를 가지고 악기”처럼 전달하고, 그 위에 이야기를 쌓아 메시지를 전한다.

정지혜 바닥소리 대표는 “창작 판소리를 하면서 내가 과연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며 “내가 생각하고 전하고 싶은 판소리는 ‘말’이라는 생각을 해왔고, 판소리의 본질 역시 말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리꾼은 판소리의 ‘말맛’을 가장 잘 전하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소리극은 ‘소리꾼의 장르’라는 것을 인지하고, 이들의 장점을 끌어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반상회-할 말 있는 소리극 동네 사람들’에 참석한 소리극 단체 판소리 공장 바닥소리, 판소리 트래블러 KA2729, 창작하는 타루 [서울남산국악당 제공]

‘반상회-할 말 있는 소리극 동네 사람들’에 참석한 작곡가 황호준의 답변은 타 장르에서 진입을 시도하는 창작자들에게 힌트가 됐다. 황호준은 국악관현악부터 실내악, 창극 등 장르를 넘나들며 한국음악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나의 대안은 연극적인 작업을 한다고 생각하고 창극을 작업한다는 데에 있다”며 “다만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수십년간 판소리를 해온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판소리의 확장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창극 안에는 배우의 욕망을 가진 사람도 있고, 가수의 욕망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판소리는 말을 하는 작업이다”라며 “산문을 많이 쓰다 보면 문어체 안에 갇히게 된다. 작가들이 소리극을 만들고자 한다면 반드시 말로 옮기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소리극에 대한 관심은 확인되나, 장르에 대한 대중적 이해와 인지도는 여전히 부족하다. 특히 민간의 소리극은 국립단체의 창극과 비교해 소수의 관객을 위한 무대로 남아있다. ‘바닥소리 작품으로 만나는 판소리 작창의 세계’ 워크숍에선 “아이들이 함께 볼 수 있는 소재가 아닌 왜 이렇게 무겁고 진지한 내용의 소리극만 있냐”며 “동화는 소리극으로 만들 수 없냐”는 질문도 나왔다. 소리극은 이미 다양한 소재로 수많은 이야기 세계를 구축했다. 그럼에도 등장한 이 질문은 소리극 장르가 마주한 현실을 보여준다. 소리극 역시 대중과의 접점을 넓히는 더 많은 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TV 안에서 소리꾼들의 실험적 음악 시도가 등장하며 전통음악은 이전보다 대중에게 친숙해졌다.

정종임 대표는 “다양한 영상 매체를 통해 소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라며 “다만 TV 경연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진 작업들이 우리의 예술적 방향과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은 그것을 판소리로 인지해버렸다”는 아쉬움을 전했다. 그러면서도 매체의 활용은 소리극의 저변 확대에 도움이 되리라 봤다. 정 대표는 “유튜브든 극장이든 공간을 넘는 다양한 시도를 통해 소리극도 더 많은 사람들과 충분히 호흡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