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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서사가 주는 힘

지난 2017년 1월,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이었던 홍모(17) 양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주지역 소재 한 통신사 콜센터에서 일하던 그는 업무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고 인근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홍양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자 실습생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이 이슈화되면서 사회적 공분을 샀다. 하지만 해당 통신사가 사건 발생 5개월 만인 그해 6월 유족들과 극적인 합의에 이르자 이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홍양의 안타까운 사연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사건이 발생 6년 만인 지난 1월. 그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영화 ‘다음 소희’가 흥행하면서다. ‘다음 소희’는 정치권의 무관심 속에서 잊히고 있었던 직업훈련 고등학생 보호법안을 살려냈다.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 지난해 1월 발의한 직업교육훈련촉진법 개정안은 국회 상임위인 교육위에서 계류된 채 심의 대상으로도 거론되지 못했지만 영화 개봉 이후 일사천리로 법안소위까지 통과, 이제 본회의만 남겨둔 상태다.

고교 현장실습생의 부당한 대우는 사실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 문제는 아니다. 관련제도가 생긴 이후 십수년간 켜켜이 쌓이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관심이나 개선 노력은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을 때 며칠 혹은 몇 달간만 이어졌을 뿐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이들의 이야기가 섬세하게 재현된 영화가 개봉되자 상황이 반전됐다. 서사가 바야흐로 제 힘을 발휘한 것이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은 “모든 진실은 한 줄로 요약될 수 없다”고 말했다. 홍양의 비극적인 스토리가 뉴스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요약본(?)만 알려지면 그 문제를 제대로 살펴보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냥 누군가에게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영화로, 소설로 작가적 상상력이 더해진 이야기(서사)가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금의 문제가 인물들의 삶에 투영되면서 내 이웃, 내 가족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문제가 더는 남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가 된다.

십수년 이상 문제가 됐던 학교폭력(이하 학폭) 문제 역시 드라마 ‘더 글로리’의 흥행으로 재조명받고 있어 반갑다. 모두가 교실 내 가장 큰 문제는 학폭이라고 공감하면서도 이렇다 할 대책은 없었다. 하지만 ‘더 글로리’ 방영 이후 학폭 문제가 있던 아들의 아버지는 주요 공직에서 낙마하고, 학폭 가해자나 그의 부모가 공직에 나설 수 없도록 관련 법안을 제정한다고 하니 ‘부모의 권력이나 재력을 믿고 친구를 괴롭히는 일들이 다소 줄어들지 않을까’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가져본다.

다만 걸리는 점 하나. ‘더 글로리 시즌 2’의 내용이 학폭 피해자 문동은의 ‘사적 복수극’이라는 점이다. 드라마가 너무 공감을 얻은 나머지 학폭 피해자들이 자신의 소중한 삶을 모두 바쳐 사적 복수에 사용한다면 우리 법질서는 어떻게 되냐는 쓸데없는 걱정. 서사의 힘을 고려해 문동은이 교사가 아니라 국회의원이 돼 학폭방지법을 제정했다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이 정도로 화제성이 크진 않았을까.

carrier@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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