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슐만 작가, 아마추어 사진가 100만장 작업중 선별
1940~80년대, 종전후 미국이 가장 풍요로운 시기
카메라의 보급으로 일반인도 자신의 일상을 기록해
“사진 찍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찍는 사람의 마음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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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노니머스 프로젝트 [사진제공=미디어앤아트] |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발레리나 튜튜를 입고 작은 공연에 나서는 소녀는 한껏 상기된 얼굴이다. 발레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 아이는 자신이 여느 발레리나보다도 멋지게 보일 것이다. 머리엔 작은 꽃으로 엮은 머리띠를, 신발은 빨간 발레리나 슈즈를 신었다. 공연장으로 떠나기 전, 정원 앞에서 취한 포즈는 어색하기 그지 없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가 귀엽기만 하다.
반바지와 컬러풀한 줄무니 티셔츠를 입은 어린 소년은 아빠의 것임이 분명한 장화를 신었다. “엄마, 이거봐! 나 발이 아빠만 해!!”라고 떠들며 까르르 웃는다.
행복한 순간을 포착한 건 유명 사진사가 아니다. 엄마와 아빠가, 사랑하는 연인이, 형제와 자매가 잡아낸 반짝거리는 일상은 7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무슨 일이 있었을까를 상상하며 웃음짓게 만든다. 영국 런던 출신 영상디렉터이자 아티스트인 리 슐만은 2017년 코닥크롬 슬라이드 필름이 담긴 빈티지 상자를 구입하게 된다. 상자속에 담긴 우리 평범한 이웃들의 생생한 순간들을 마주한 작가는 이때부터 ‘어노니머스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어노니머스(anonymous, 익명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슐만은 전 세계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작업을 수집하고 선별해 전시로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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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노니머스 프로젝트 [사진=미디어앤아트] |
서울 종로구 그라운드시소 서촌은 어노니머스 프로젝트의 국내 첫 대규모 단독 전시를 11월 25일부터 내년 4월 2일까지 개최한다. 슐만의 100만장에 이르는 컬렉션 중 1940년대와 1980년대까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촬영된, 일반인의 일상을 담은 사진들을 선별했다. “어떤 경우엔 수 천장의 사진을 보더라도 단 한 장도 건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난한 과정 속 마음에 드는 사진을 만나는 건 인내와 끈기로 점철된 긴 노동의 결과물이다. 전시엔 이 컬렉션 중 일부가 나온다.
이 시기는 미국 경제가 역사상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다. 전쟁물자를 생산하면서 산업이 활력을 찾았고 종전후엔 완전고용이 일어났다. 마릴린 먼로가 스크린을 점령하고, 엘비스 프레슬리가 최고의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미드 센추리 모던 가구도 중산층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퍼졌고 카메라가 일반화 되면서 전문적 사진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아이의 탄생이나 처음 자전거를 탄 순간 등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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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노니머스 프로젝트 [사진=미디어앤아트] |
전시에 나온 사진들은 관객들에게 상상을 해보라고 권한다. 사진의 앞 뒤에 숨겨져 있을 이야기를 떠올려보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카메라 뒤의 사람의 모습과 튜브 위에서 여름휴가를 즐기는 아이의 기분을, 댕댕이와 함께 보낸 시간들과 친구와 함께 떠나는 로드트립의 설렘을 펼쳐낸다. 지금은 인스타그램으로 일상을 공유하지만, 당시 사용한 코닥크롬 슬라이드 필름은 현상하는데까지 시간이 오래걸리고 관리가 쉽지 않다는 것을 제하면 인스타그램에 못지 않다. 소중한 순간이라 생각하는, 그것을 간직하고픈 마음은 모두 같기 때문이다.
전시의 부제는 ‘우리가 멈춰선 순간들’이다. 디지털시대의 아날로그적 향수가 물씬 풍기지만, 전시가 바라는 방향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리 슐만은 “사진을 찍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그것을 촬영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나 생각은 다르지 않다”고 한다. 필름 속에서 수 십년 뒤 빛과 함께 되살아난 그 순간들은 시공을 넘어 관객과 연결된다. 우리를 멈춰서게 하는 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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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노니머스 프로젝트 [사진=미디어앤아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