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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팀장시각] ‘대출런’의 시대

“평소 주간 대출 한도가 30억원인데 한 달 한도를 20억원으로 줄이다보니, 벌써 끝났습니다. 이번달은 대출이 안되니, 11월에 오세요.”

대출 받기가 어느때보다 어렵다. 급증하는 가계 빚을 줄이고자 정부가 대출 총량 증가율을 6%대(6.99%까지)로 맞추라고 했는데, 4분기 시작하자마자 이미 연간 목표치 턱밑에 도달한 은행이 많다. 은행들은 실수요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마이너스 통장을 연말까지 판매하지 않고, 지점별로 대출 한도를 둬 속도 조절에 나서고 있다. 수요자는 부득이하게 대출 상품이 풀리는 시점을 기다렸다가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받아야 하는 ‘대출런’에 나서게 됐다.

대출은 모아둔 돈으로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때 시행한다. 주택 등 자산을 늘리거나 혹은 치료비나 교육비가 한꺼번에 많이 들어갈 때, 쌓아 놓은 신용도나 다른 자산을 담보로 활용해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린다. 가계부채가 1800조원 규모로 사상 최대로 급증한 까닭은 수년 새 자산 가격이 급등했기 때문이다. 특히 집값은 끝이 어딘가 싶게 무섭게 오르고 있다.

KB부동산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전국의 아파트 가격은 전년 동월 대비 20.6%가 올랐다. 서울은 17.6%가 상승했다. 서울 중간값 아파트는 10억 60000만원으로, 2017년 4월 6억원을 넘긴 뒤 해마다 1억 원 씩 몸값을 높여갔다. 매년 소득이 적어도 1억 원 씩 늘지 않는 한, 일해서 번 돈으로 집 을 사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실거주 목적인 전세 상황은 더 심각하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전세 계약단위를 감안한 2년 전보다 24.3%가 올랐고, 연립주택도 16%, 단독주택도 10%가 상승했다. 9월 서울 아파트 중위 전셋값은 6억2600만원으로, 2년 전 4억6800만원에서 억 단위로 올랐다.

시중은행 관계자들은 “집값 전셋값이 올라서 받아야할 대출 규모가 늘었는데, 어떻게 6%대 상한을 맞추냐”고 볼멘 소리를 내고 있다.

대출 정책을 내놓기로 한 당국도 고민이 많다. 대출 총량은 누르면서 실수요자 피해는 없어야 하는데, 대출 실수요자를 발라내는 작업은 단순히 대출 목적이나 자산규모만으로 정하기 어렵다. 고승범 금융위원장이 취임 직후부터 “가계부채 관리방안을 추가로 내놓겠다”고 했지만, 점차 미뤄지는 이유다.

실제 대출 정책은 ‘갚을 능력’을 까다롭게 살피도록 기준을 높이는 것 외에는 쓸 수 있는 카드가 없다. 총량을 한정하거나 보다 여유가 있는 고소득 등에게 대출 접근을 제한하는 것도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 어렵다. 앞서 공급을 억제하고 주택 가격이나 지역별로 차별화 한 수 십번의 정책에도 실패한 부동산을 봐도 그렇다.

대출시장이 이미 심리전으로 번진 것도 간과해선 안된다. 여러차례 대출 총량 경고가 이어지고, 정책 예고가 나오면서 수요자들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선착순으로 문이 닫힌다고 예정된 트랙 위에서 달리는 이들처럼, 대출을 미리 받아두고 있다.

목돈이 필요하지 않아도 대출을 실행해두는 시대. 금융의 본래 역할이 유동성이 필요한 곳에 원활히 공급하는 것임을 상기하면, 현 상황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되짚어볼 때다.

yjsu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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