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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 치세 높인 최덕지 초상은 15세기 것”…조정 전체 노량진 배웅
영암 전주최씨 연촌종가, 보물 실증적 설명
최덕지-최정 후손 영보촌 향약 500년 계승
종가 10석, 마을 20석 출연 호국·구휼 사용
최덕지 초상, 한석봉 현판 영보정 보물 지정
연촌 최덕지 초상(보물 594호) 그는 세종,문종의 총애를 오래도록 받았다.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전남 영암 북쪽 백룡산 형제봉 자락의 영보촌은 여민동락의 향약 동계와 향촌문화가 꽃 핀 곳이다. 공동체문화는 호국과 상생으로 이어졌다.

평생을 공직에 투신하다 은퇴후 상생의 공동체의 단초를 제공한 전주최씨 연촌(존양) 최덕지(1384~1455)의 손길이 세심하게 닿은 마을이다.

최덕지는 사헌부감찰, 김제군수, 남원부사 등을 역임했다. 흉년에 고통받는 백성에게 구휼미를 베풀기 위해 논공법이라는 세법을 상소해 세종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관직을 그만두고 처가인 전남 영암 영보촌에 낙향했는데, 문종이 다시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올랐다.

67세되던 1451년 연로함을 이유로 사임하자 사육신 등 당대 석학 28인이 노량진나루터에 나와 시부(詩賦)를 지어 칭송하며 송별했다고 한다.

최덕지는 낙향후 후학을 양성하고 민생현장을 돌보며 상생 공동체의 단초를 모색했다고 한다. 그를 배향한 곳은 참 많다. 영암의 존양사(녹동서원), 전주의 서산사, 남원의 주암서원 등이다.

나라에서 멀쩡하게 보물로 지정한 15세기 충신 최덕지의 초상화의 제작 시점을 두고 최근 논란이 일었다. 사료를 갖고 있는 종가의 실증연구 바깥, 학계 일각에서 문제제기가 있었다.

지난 2월 발간된 학술지 미술사학에는 여러 기록과 회화 기법 등을 근거로 보물 지정본은 18세기에 원본을 보고 베껴 그린 그림이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궤 속 그림이 더 오래된 17세기 작품이라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실렸다.

이에 대해 최덕지 후손인 최순주 씨는 26일 “여러 문헌을 검토했을 때 보물로 지정된 최덕지 초상은 1451년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왕명으로 제작한 원본”이라고 실증적인 설명을 내놓았다.

보물 ‘최덕지 초상 및 유지 초본’은 초상화와 밑그림에 해당하는 초본(草本) 등 2점으로 구성된다.

최덕지 문집 연촌유사(煙村遺事)를 번역하고 최덕지 관련 책을 펴낸 최씨는 조선왕조실록과 연촌유사를 살펴 최덕지가 1451년 10월 29일 은퇴 상소를 올렸고, 그해 11월 8일 한강에서 송별연을 벌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선 중기 문신인 김육이 1651년에 저술한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을 보면 최덕지와 관련해 “초상화를 하사하므로 영광이 한 시대에 크게 빛났다”(其像賜之一時名勝)는 문구가 있어 보물 초상화가 국왕 하사본임을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최씨는 또 미술사학 논문에서 최덕지 초상의 이모(移模·서화를 본떠 그림) 근거로 제시된 문구인 ‘폐우개작’(弊又改作)은 ‘폐하고 다시 만들다’가 아니라 ‘헐어서 다시 고치는 일을 했다’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폐우개작이 최덕지 후손인 최정이 지은 글 ‘연촌화상개장찬’(煙村畵像改粧贊)에 나오는데, 만약 이모를 했다면 글 제목이 ‘연촌화상이모찬’(煙村畵像移模贊)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최씨는 현존하는 최덕지 초상 5점을 놓고 비교했을 때 최덕지의 왼쪽 허리에 있는 삼각형 공간이 보물 지정 2점과 주암서원본에는 있지만, 궤 속 그림과 20세기 신본에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삼각형 부분이 없어진 것은 후대의 오류”라며 "궤 속에 있는 그림은 1769년에 완성한 이모본이고, 화가가 최덕지 앞에서 그린 초본과 가장 흡사한 보물 지정 그림이 원본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한편 최덕지와 그 사위 신후경(거창신씨)이 지은 마을 공동체의 중심, 영보정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지만 후손 최정, 신천익 등이 중건해 역사성과 조형미, 기술성 등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제2054호로 지정됐다.

과거급제해 출사하고도 조기에 낙향해 영보촌 공동체에 헌신한 최정(1568~1639)은 존양사 건립, 영보정 중건, 최덕지 시문을 모은 ‘난후문고수록지’ 간행, 향약동계의 활성화 등 문화유산 보존·계승에 큰 공을 쌓았다.

최씨네의 합경재, 신씨네 송양사에 영보 동계자료 8책이 전해지고 있다. 동계의 규약과 운영은 시대에 맞게, 분쟁소지가 없게 최정 등이 개정했다. 이 동계는 1550년 연촌 최덕지와 그 내·외손들이 만든 목족계가 전신이다.

친족들 중심의 동족계가 유지되면서 전체 동민을 포괄하는 동약으로 발전한다. 동족계가 10석, 동약에서 20석을 출연, 거액을 펀딩해 호국,상생,구휼등에 활용했다.

후손 최동림(1909~1948)은 일제 하 1932년 소작쟁의 때 영암 형제봉만세사건을 주동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다. 일본인이 강탈한 논밭의 반환을 주장하며 경찰서로 행진하다 100여명 중 70명이 체포돼 구속된 사건이다.

최덕지가 강학했던 장소인 존양루 현판은 안평대군 친필이라고 한다. 존양루에는 최덕지가 낙향할 당시 노량진에서 송별했던 류성원(‘유미사송최선생’ 동문선 수록), 이개, 하위지, 정인지, 신숙주, 박팽년, 서거정, 김종서 등 28인의 송별시가 현판으로 보전됐다.

[취재협력: 전남종가회, 영암 전주최씨 연촌종가, 남도일보]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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