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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칼럼] 고추농사가 기가 막혀

강원도 시골집의 덱(Deck) 위에서 내려다보면 고추밭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봄부터 흘린 땀방울이 열매를 맺어 빨갛게 익은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 붉은 유혹, 뇌쇄적인 자태는 황홀할 지경이다.

고추는 한자로 ‘고초(苦椒·苦草)’라고 한다. ‘매워서 먹기에 고통스러운’ 고추는 재배 과정에서도 고통이 뒤따른다. 그만큼 고추농사는 만만치 않다.

매운맛을 자랑하는 고추지만 작물로서의 자생력은 거의 맹탕 수준이다. 성장 과정에서 홀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다. 지지대를 세워 끈으로 단단히 지탱해주지 않으면 바람과 폭우에 툭 하면 쓰러진다. 또한 탄저·역병, 진딧물·담배(거세미)나방 등 각종 병해충에 취약하다. 이렇다 보니 순식간에 병해충이 번져 농사를 망치기도 한다. 농부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해마다 작게라도 고추농사는 꼭 짓는다. 하지만 첫 농사를 제외하곤 예외 없이 병해충에 시달린 탓에 성적표는 거의 낙제 수준이다. 이를 벗어나고자 올해는 고추농사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무엇보다 고추의 자생력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췄다.

먼저 모종부터 종전의 일반 모종보다 훨씬 비싸지만 병에 강한 내병성 품종으로 바꿨다. 또 모종을 심는 이랑을 더 높이고 폭도 배 이상 넓혀 배수를 원활하게 하고 뿌리가 맘껏 뻗어나갈 수 있게 했다. 모종의 식재 간격 또한 충분히 띄워 통풍과 채광을 좋게 했다.

그 결과, 올해 고추농사는 해마다 반복되던 ‘병충해 폭망’에서 벗어났다. 애초 화학농약·비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기에 병충해를 완전히 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탄저균·벌레와의 공존을 받아들이되 근본적으로 고추의 자생력을 키워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전략이 주효한 것 같다.

또 올여름 장마가 짧게 끝나 고질적인 탄저병이 심각하진 않았고, 주기적으로 천연 방제를 해준 것도 병충해 선방에 한몫했다.

자생력으로 키운 작물은 일반 재배작물에 비해 그 맛의 차원이 다르다. 자연의 기운이 담겨 약성 또한 뛰어나다. 사실 병 없이 잘 자란 고추만큼 쓰임새가 다양한 작물도 드물다. 고춧가루나 이를 주재료로 만든 고추장은 각종 찌개나 국·김치 등의 양념으로 빼놓을 수 없다. 풋고추를 따서 그대로 된장에 찍어 먹거나 ‘고추 장물’이나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으면 밥도둑이 따로 없다. 고춧잎 또한 데쳐서 나물로 먹으면 입맛을 돋워준다.

고추의 매운맛은 ‘캡사이신(Capsaicin)’이라는 물질에서 나오는데 소화 기능을 촉진하고 감기나 기관지염, 가래 제거, 다이어트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특히 코로나19 같은 감기·독감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력을 높여주는 비타민C가 감귤보다도 훨씬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유명 비뇨기과 의사는 “웬만한 정력제보다 더 낫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익은 고추를 두 번 수확해 고춧가루 36근(18kg)을 얻었다. 앞으로도 서너 차례 더 수확이 가능하다. 병충해로 인해 일부 망가진 것이 없진 않지만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다.

“내년에는 고춧가루를 사 먹어야 할 판”이라며 은근히 압박하던 아내도 만족의 미소를 짓는다. 땀 흘려 돌보아준 농부에 보은하듯 주렁주렁 잘 익은 고추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힐링까지 얻게 해준다. 기가 막힌 고추농사의 반전. 고초(苦草)가 선물하는 고진감래(苦盡甘來)요, 해피엔딩이다.

박인호 전원칼럼니스트

thin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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