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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칼럼] ‘체급 한계’ 불문율 허무는 K-격투기

1980~90년대 TV에서 보던 우리나라 복싱 세계챔피언들은 유독 작았다. 경량급이어서 그랬다. 두 명의 영웅 장정구·유명우는 50㎏ 미만 플라이급이었고, 신장이 170㎝가 넘었던 최용수·지인진이 60㎏ 미만 라이트급이었다. 75㎏ 남짓한 슈퍼미들급에 박종팔이 있었지만 신설 단체, 신설 체급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라 사정이 좀 달랐다.

수십년을 지켜본 프로 복싱 판에서 내린 결론은 동남아시아인은 경량급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미들급·헤비급은 다른 인종의 무대이며, 특히 헤비급은 순전히 흑인의 판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업계 관계자, 해설자들도 이를 당연시했다. 비탈리-블라디미르 클리츠코 형제, 타이슨 퓨리 같은 백인 거인들이 헤비급에서 예외적인 활약을 펼쳤지만 아주 드문 예다. 개인의 확증 편향은 아니다. 현대속어인 ‘흑형’이란 표현에 인종차별보다는 신체능력에 대한 경탄의 뉘앙스가 들어 있다는 점은 이런 인식이 일반화된 것을 의미한다.

UFC로 대표되는 21세기 신종 스포츠 종합격투기도 상황은 매우 유사해지고 있다. 체중 78㎏을 넘어가는 웰터·미들·헤비급에 각각 카마루 우스만, 이즈리얼 아데산야, 프란시스 응가누 등 흑인 챔피언이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라이트헤비급만이 챔프 잔 블라코비치를 비롯해 랭킹 5위까지 백인과 히스패닉으로 ‘비흑인 구역’을 형성하고 있지만 딱 봐도 이건 ‘백인 할당’이다. 파운드포파운드 1위인 전 라이트헤비급 챔프인 흑인 파이터 존 존스도 굳이 헤비급으로 월장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UFC 판에 요즘 눈을 의심할 사건이 연속으로 벌어지고 있다. 미들급 박준용(30)이 3연승(1패)으로 질주하고 있고, 라이트헤비급 정다운(28)이 4경기 무패(3승1무)로 종횡무진하고 있다. 케이지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승리를 만끽하는 이들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낯선 광경이다. 미들급은 아시아 최강이던 추성훈도 데뷔전 후 내리 4연패하며 꼬리를 내린 무덤과 같은 체급이다. 라이트헤비급은 정다운 이전에 아예 선수 자체를 내지 못 했던 체급이다.

전 세계 팝시장을 호령하는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가 불쑥 연상된다. 빌보드 최상단을 오르내리고 유튜브 최다 조회 수를 수시로 갱신하는 그들이 거둔 위대한 성과에 비하면 미약할 뿐이지만 대견스럽기로는 박준용과 정다운도 못지않다.

이들은 어떻게 피지컬의 벽, 편견의 벽을 허물고 이런 실적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 이 두 명의 소속팀인 코리안탑팀 전찬열 대표에게 들어 보니 선수의 발굴·훈련 시스템이 대형 연예기획사의 철저하고 치밀한 아이돌의 그것을 방불케 할 정도다. ‘예외적 피지컬을 지닌 떡잎을 고르고 골라 고도화된 트레이닝 노하우로 키운다면 극복할 수 있다’라고 하는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유명 일선 지도자들도 지레 겁먹고 포기한 상위 체급에서 ‘할 수 있다’는 확신과 목표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지금이 있었단다. “기적 맞지요”라고 맞장구친 전 대표는 그래도 아직 멈출 생각이 없다. 우선 이들을 10위 안으로 진입시키고 추후 타이틀샷도 바라보겠다는 각오란다. 편견이 박살나는 것은 종종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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