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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물뽕, 6시간이면 사라져…‘증거 부족’ 약물·불법촬영 성폭력수사 답보”
경찰, 2019년 ‘약물 관련 성범죄 수사지침’ 개정했지만
피해자 “약물 검출되지 않아 기소도 안되는 악습 이어져”
관련 단체들 회견…“불법촬영 전자기기 압색·외부 저장공간까지 수사 필요”

15일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준강간사건의정의로운판결을위한공동대책위원회 등 5개 단체가 경찰 수사 진전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주소현 기자/addressh@heraldcorp.com

[헤럴드경제=주소현 기자] “GHB 약물(물뽕)은 6시간이면 인체에서 대부분 빠져나가 피해자에게서 약물이 검출된 사례는 지난 2015~2018년, 4년 동안 한 건도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명백히 관찰 가능한 15분 분량 동영상이 발견됐으니 이제는 악한 관습을 끊어낼 작은 계기라도 마련된 것이 아닌지요?”

15일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윤경진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가 대독한 약물·불법촬영 성폭력 피해자 A씨의 말이다. 이날 준강간사건의정의로운판결을위한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 등 5개 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력상담소에서 지원하는 수많은 약물 의심 성폭력이 약물 검출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불기소 처분되거나 법적 처벌을 피해 간다”고 규탄했다.

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20대 여성인 A씨는 지난해 7월께 당시 남자친구였던 B씨의 휴대폰에서 자신의 나체 사진을 발견하고 서울 서초경찰서에 B씨를 불법촬영과 마약 투약 혐의 등으로 신고했다. 신고하기 약 2주 전 A씨는 B씨와 데이트 중 평소 주량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양의 술을 마시고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경찰에서 B씨의 휴대폰 디지털 포렌식 조사를 통해 확보한 피해촬영물에서 A씨는 의식이 있었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성적 가해를 맞닥뜨려야만 했다.

A씨가 약물에 의한 성폭력을 인지한 이후 관련 수사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A씨에게 약물이 검출되지 않은 상황에서 영상 감정만으로 약물 이용에 관한 판정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에 A씨는 올해 1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촬영물 감정을 의뢰한 상황이다.

“약물 검출되지 않아도 수사 가능하게 해야”

문제는 해당 약물의 특성상 경찰 수사에서 피해자의 몸에서 약물을 검출할 수 없다는 점이다. ‘데이트 강간 약물’로 불리는 향정신성의약품 GHB, 이른바 ‘물뽕’은 체내에 들어오면 10~15분 내에 의식을 잃지만 24~72시간 이내에 몸 밖으로 배출돼 범죄에 악용되기 쉽다고 알려져 있다.

경찰도 GHB 약물의 증상을 인식하고 수사 지침에 반영하고 있다. 2019년 8월 경찰청에서 개정한 약물 관련 성범죄 수사지침서에는 GHB 증상이 주변 사람과 정상적으로 대화하지만 잠든 후 깨어나면 전혀 기억을 하지 못함, 자유의지를 상실한 채 지시에 맹목적으로 따름이라고 언급돼 있다.

지침이 개정됐으나 수사는 답보하고 있다는 게 A씨의 주장이다. A씨는 “수사지침서를 개정까지 하고도 약물이 인체에서 검출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해자를 기소조차 하지 않는 악습이 2021년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약물이 검출되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정상적이지 않은 동영상이 발견된다면 수사지침서에 준해 기소하도록 관련 수사지침을 개정하는 등 뭔가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촉구했다.

유호정 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는 “A씨는 완전히 기억과 의식을 잃었으며 B씨는 유학 시절부터 종종 마약을 하며 A씨에게 약물을 권했던 사람”이라며 “A씨 진술 외에도 B씨의 약물 사용 이력, A씨의 심신 상실 상태가 의심되는 영상 등을 통해 약물이 사용됐다는 여러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유포 여부 확인은 피해 회복의 첫 걸음”

이들은 불법촬영 범죄에 대해서도 촬영을 비롯해 유포 여부까지 경찰 수사 단계에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들은 불법촬영물이 완전히 삭제되고 유포 가능성까지 차단되기를 바라나 가해자들은 휴대폰이나 노트북 등 증거를 인멸하거나 온라인 공간에 저장하는 등 쉽게 수사망을 벗어난다는 이유에서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여한 김여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피해지원팀장은 “B씨의 휴대폰 포렌식 결과 A씨가 정신을 잃고 피해를 입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에 가해자의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폴더에서 파일을 업로드하거나 재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값이 발견됐다”며 “B씨가 인지하기 전부터 불법촬영이 있었고 이들 촬영물을 외부 저장 공간에 업로드했고 다른 사람에게도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경찰이 A씨에게 B씨의 노트북을 압수수색하겠다고 밝힌 것과 달리 임의제출을 요청한 점도 지적했다. B씨가 경찰에 노트북이 파기됐다고 주장한 탓이다. 김 팀장은 “가해자가 휴대폰을 잃었다고 말해 수사가 종결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즉각적인 압수수색이 이뤄지지 않아 가해자가 충분히 증거 인멸을 시도하고 전자기기를 제출할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김 팀장은 또 “사이버성폭력은 피해 경험자의 신체와 분리된 채로 발생해 사건 대응 과정에서 피해자가 소외되기 십상”이라며 “국가에서 피해 경험자가 스스로 닿을 수 없는 폭력의 현장에 뛰어들고 피해자가 닿을 수 없는 곳을 수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이버성폭력은 기록이 남아 진상 규명하는 데 더 수월할 수 있다”며 “사이버 공간이 성범죄를 숨기기 쉬운 가해자의 공간이 되는 게 아니라 끝끝내 잡힐 수밖에 없는 공간이 돼야 하지 않겠냐”고 소리를 높였다.

addressh@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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