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암대동계’ 350년 마을자치 모범 애송당종가·구암사 문화유적 보존 [남도종가의 재발견]
남평문씨 애송당종가
정유재란 의병 문익현 집성촌 이뤄
남평문씨 애송당종가 전경.

월출산 동쪽 활쏘기 훈련장이 있던 활성산 아래 영암읍 장암리는 미풍양속을 지키고 마을 자치를 위해 조직된 대동계를 350여년 동안 지속하고 있는 집성촌이다.

남평문씨 집성촌 장암리는 장암정, 애송당종가, 구암사 등의 문화유적을 보존하며 아름다운 전통마을로 가꿔가고 있다.

고려때 남평(나주)의 바위(문암) 위에서 발견됐다는 시조 문다성 이후, 고려 숙종(재위 1095~1105년) 서북면병마사를 지낸 문익이 남평문씨의 중시조가 되고, 문익의 손자인 3세 충숙공 문극겸(1122~1189)이 무신의 난 때 탁월한 정치조율사 역할을 하면서 문무겸전의 재상, 중서시랑평장사에 오르면서 주목받는다.

애송당 종가는 정유재란때 의병을 창의해 활약한 중시조 15세 문익현(1573~1646)의 호이다. 12세 문맹화(?~1487)가 영암군 영보촌에 입향한 후, 증손자 문익현이 세거지를 옮겨 장암정마을(장암리)에 집성촌을 이루고 애송당종가를 열었다. 앞서, 10세 문익점(1331~1400)은 애송당과는 다른 파인 충선공파 파조가 된다. 원나라에 파견 갔다가 ‘길가의 목화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실록은 전한다. “붓 두껑” 스토리는 흥미를 더한 과장으로 추정된다고 각종 백과사전은 분석하고 있다.

문맹화는 단종 폐위와 세조 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파주를 떠나 영암 영보촌에 입향한 바 있다. 그의 증손자 15세 태인현감 문익주(1535~1605)는 효자이자 청백리로 소문났고, 임진왜란에는 김천일·고경명 등과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두 영암 구암사(창건 당시 삼현사)에 배향됐다. 문익현이 연 애송당 종가는 1667년 18인의 계원을 모아 장암 대동계를 출범시켰다. 계원은 이후 마을 대부분을 커버할 정도로 크게 늘었는데, 향약 4대 강령을 실천하며 현재까지 350여년을 유지하고 있다. 마을 주민 스스로 치안과 풍속, 상조와 장학 등을 관장하는 장암대동계는 마을 유생들이 글을 읽는 장소, 회갑연 잔치, 백일장 등을 위한 공동시설로 1668년에 장암정을 지었다. 현재 전남 문화재가 됐다. 함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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