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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란 의병장 ‘불천위’ 명예…대대손손 충의 명문가 [남도종가의 재발견 - 호국 테마 양대 종가]
창평 장흥고씨 학봉종가
구한말 ‘불원복’ 군기 앞세워 항전
매년 노비 제사…종가 음식도 일품
담양 장흥고씨 학봉종가

장흥고씨는 고려 후기, 제주고씨 중시조로부터 10세손인 고중연이 외적 침입때 공민왕을 잘 보좌한 공을 인정받아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지고 후손들이 장흥 일대에 터 잡으면서, 제주와는 별도의 본관을 삼게 됐다.

이후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문신이자 선비인 고경명-고인후 부자가 지방 리더의 책임감으로 의병장이 되어 전공을 세우다 전사한 뒤, 학봉 고인후의 함평이씨 부인이 위기에 빠진 고씨 일가를 거느리고 친정가문의 랜드마크 상월정이 있는 창평(담양)에 이거하면서 장흥고씨 학봉종가가 성립된다.

16세기 고경명 삼부자에 이어, 19~20세기 학봉종가의 후손 고광순 역시 의병장이 되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산 교육장, 창평에 있는 ‘호남의 정신관’에서는 작금의 팬데믹 상황을 제외하곤 의병 체험을 하는 남녀노소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제봉 고경명 의병장은 문과, 무과, 이과, 예과 중 문과에 가깝다. 진사시험 입격후, 벼슬길을 여는 2차시험 식년시 문과(1558년)에서 장원급제한다. 요즘으로 치면 행시·사시 통합수석이다. 정치적 우여곡절 속에 삼사교리, 세 곳의 군수, 성균관교수, 당상관인 예조참의, 동래부사 등을 하면서 파직과 복직을 거듭했다. 낙향 중 쓴 시문 제봉문집 목판 등은 문화재다.

1592년 일본이 침략하자 6000명의 자원자 등을 규합해 의병장으로 나섰다. 진주전투 직후 순절한 큰아들 고종후 의병장은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진주 3장사로 불린다. 둘째아들 인후와 고경명은 금산전투에서 순국한다. 숭고한 희생에 국가는 고경명-종후-인후 삼부자 집안에 숱한 영예의 추서와 함께 ‘불천위’(나라에서 큰 공훈을 인정하여 제사를 영원히 모시도록 허락함) 명예도 내린다.

300년쯤 뒤 고광순 구한말 의병장은 “가국지수(家國之讐 집안과 국가의 원수)를 갚자”며 의병을 모았다. 의병 최초로 소총부대로 편성 지리산 피아골에 들어가 훈련하고 60세까지 ‘불원복’ 군기(나라를 곧 되찾게 될 것이니 힘껏 싸우라는 격려를 담은 태극기·등록문화재)를 앞세워 장기항전했다.

장흥고씨 학봉파는 ‘봉이·귀인’ 등 가족같이 지내던 노비의 제사도 매년 올린다. 씨간장으로 맛을 낸 종가음식, 죽로차, 녹차설기떡은 유명하다. ‘소나무 언덕’이라는 한옥스테이로 국민과 종가문화를 나눈다. 고경명 집안을 의병으로만 기억하는 것도 완전치 않다. 그 집엔 아름다운 K헤리티지의 면모가 다 있다. 함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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