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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칼럼] 소금이 맛을 잃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자염(煮鹽)을 만들어서 썼다. 고려 충선왕이 즉위한 1309년 도염원(都鹽院)을 설치하면서 처음 관제염을 생산했다. 조선 시대에는 전국의 소금배들이 한양 마포나루로 모여들었다. 염리동에는 소금장수들이 모여 살았고, 바로 옆 대흥동에서는 염전이 들어섰다.

1885년부터 일본소금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904년에는 청국소금 수입량이 일본소금을 능가했다. 조선 자염은 100척당 77전에서 1원83전에 거래했다. 청국 천일염은 50전에 불과했다.

천일염은 햇볕에 말려서 생산한다. 자염은 갯벌에서 바닷물보다 염도가 5배 높은 염수를 얻어서 끓이는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한다. 연료비 때문에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다.

최초로 천일염 생산을 시도한 사람은 1902년 한양에서 목포로 발령받은 일본 외교관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郞·1869~1953)다. 청나라 항주에서 근무한 경험 때문에 전라남도 기후와 지리가 천일염 생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04년 목포 고하도와 신안 하의도를 천일염전 예정지로 조사한다. 1905년에는 목포·해남·진도·자운도 등 전라남도 21곳 간척 예정지를 조사한다.

통감부는 1907년 목포가 아닌 인천 주안에 1헥타르(ha) 규모로 시험염전을 만든다. 최초의 천일염전이다. 1912년부터 단계적으로 주안에 대규모 천일염전을 만들면서 ‘인천 짠물’이라는 말이 생겨난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중국 산동산 소금을 대체한 최초의 관제염전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생산한 소금은 늘 부족했다. 1952년 ‘소금 증산 5개년계획’을 시작하면서 자급할 수 있었다. 1961년에는 일본으로 수출까지 했다.

우리나라 전통 자염이 사라진 지 50년 만인 지난 2001년 태안에서 복원했다. 100년 전에는 천일염보다 비싸서 경쟁력이 없는 소금이었다. 지금은 고급 소금이라서 천일염보다 더 비싼 값을 받는다. 2014년 국제슬로푸드생명다양성재단은 태안자염을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추가했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음식을 찾아내는 프로젝트다. 자염은 인류가 지켜야 할 맛이라는 뜻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식재료 소금이 중요하다. 짜게 먹는 식습관 때문에, 김치나 간장을 만들 때에, 생선이나 어패류를 소금에 절여서 부패를 막으면서 적절하게 발효시켜 젓갈을 만들 때에도 좋은 소금이 있어야 한다.

맛과 부패 방지의 대명사가 소금이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기독교인을 소금이라 했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마태 5:13). 기독교인은 세상에 맛을 내는 사람들이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마가 9:50). 소금이 맛으로 식재료를 조화롭게 하는 것처럼 기독교인은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조미료다.

서울시 공공보건의료재단에서 분석한 서울시 주요 코로나 감염 원인별 현황에 따르면, 11월 27일 현재 감염자 8317명 중에서 해외 유입 확진자가 530명으로 제일 많았고, 홍대새교회 확진자는 89명으로 두 번째로 많았다. 광복절 집회로 말미암아 확진자가 속출한 지난 9월 2일 현재 서울 지역 누적 확진자 4062명 중에서 제일 많은 1028명이 종교시설에서 나왔다. 25.3%나 된다. 성북구 사랑제일교회 한 곳에서만 629명에 이르렀다. 소금이 맛을 잃었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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