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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도는 없다’는 이영훈에 답하다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은 독도를 있지도 않은 ‘환상의 섬’이란 주장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다. 독도의 실체를 부정하는 이영훈의 논리의 출발은 ‘태종실록’1417년 2월5일 기사다. ‘15가구 86명이 살고 있는 우산도에서 거주민 3명을 데리고 나왔다’는 안무사 김인우의 보고다. 86명이나 살고 있었다는 우산도를 독도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우산도는 독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런 가운데 독도전문가인 유미림 박사가 태종실록의 우산도가 울릉도의 착오임을 입증하는 기록을 찾아냈다. ‘세종실록’1425년 8월8일 기사다. 무릉도에 도망가 살고 있던 사람들을 1416년에 김인우가 데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태종실록’의 기사가 1417년이지만 김인우의 조사는 1416년에 있었으므로 ‘태종실록’에서 말한 우산도가 ‘세종실록’에서 말한 무릉도임을 밝힌 것이다.

‘독도는 환상의 섬인가’(지식산업사)는 독도전문가인 유미림, 지리학자인 이기봉이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에서 이영훈이 기술한 ‘독도’관련 내용의 허위를 사료를 근거로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영훈은 ‘세종실록 지리지’의 “우산과 무릉 두 섬은 현의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떨어짐이 멀지 않다. 날씨가 좋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때는 우산국이라 칭했는데 울릉도라고도 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우산은 원래 나라 이름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것을 섬으로 간주하는 오해가 생겼다. 그러니까 우산도는 실재하지 않은 환상의 섬이다”는 주장을 편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를 비롯, 18세기 전반까지 많은 지도가 울릉도 서쪽에 울릉도와 비슷한 크기의 우산도를 그린 점을 들어 우산도의 부재를 주장한다.

이와 관련, 저자들은 일제강점기 전까지 조선시대 지도제작은 정확한 위치를 측정할 수 있는 근대식 측량을 시행하지 못했다는 점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도제작자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두 섬은 (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는 정보를 근거로 위치나 크기는 상관없이 두 개 섬의 정보만을 담아냈다는 것이다.

반면 영조의 명을 받아 신경준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엔 울릉도 쟁계(안용복 사건) 속의 우산도=마쓰시마(松島, 독도)라는 지식을 담아 울릉도 동쪽으로 작은 섬, 우산도(독도)를 그려놓았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언급된 석도에 대한 논쟁도 이어진다. 이영훈은 석도가 우산도가 아닌 관음도라는 주장을 편다. 19세기말 울릉도는 개척령에 따라 이주민이 입도하기 시작하는데 일본인의 침탈이 심해지자 양국이 공동조사를 벌이게 된다. 그 결과, 칙령 제41호가 발호된다. 요지는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며, 울도군 구역으로 울릉전도와 죽도, 석도를 정한 것이다. 우산도가 갑지기 석도(石島)가 된 데 대해,저자들은 당시 울릉도 이주민의 82.1%가 전라도 사람이었는데 이들은 울릉도 곳곳에 우리말 지명을 만들어 불렀다며, 돌섬으로 불리는 우산도를 전라도식으로 독섬으로 불렀다고 설명한다. 이를 복명서에 한문으로 쓰는 과정에서 석도로 표기했다는 설명이다. 지금의 독도라는 이름은 전라도 방언 독섬에서 나왔다는 얘기다.

1900년 대한제국 칙령41호는 1905년 이전 대한제국이 울도군을 관할했음을 보여주는 사료로도 중요성이 있다. 이영훈은 1905년 일본이 선점, 유효한 영유권을 획득했다는 무주지 선점론을 내세운다.

독도논쟁이 일 때마다 다양한 사료를 근거로 저마다 논리를 펴지만 체계적인 설명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우산도의 실체, 독도로 표기된 과정을 명쾌하게 설명해 놓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독도는 환상의 섬인가/유미림·이기봉 지음/지식산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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