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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팀장시각] 2020년 남한산성

요즘 기자 일을 시작한 후배들을 만나면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을 권하곤 한다. 남한산성에 갇힌 조정 대신들이 주화론과 척화론을 논하는 ‘말’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논쟁은 성안에 갇힌 민초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이 이야기에서 오랑캐와 화친하자는 최명길과 대의를 내세운 김상헌보다 중요한 인물은 대장장이 서날쇠다. 지체 높은 사람들이 대의명분과 실리를 논쟁하지만 서날쇠는 거기에 관심이 없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해 죽지 않고 다시 봄을 맞이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요즘은 검찰도, 언론도 진영이 확연히 나뉘어 있다. 계기는 지난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였다. 이 사건 이후로 윤석열 검찰총장은 ‘적폐척결’의 주체에서 청산 대상이 됐다. 수사는 무의미하지 않았다. 정경심 교수로부터 종잣돈을 받은 조 전 장관의 5촌 조카가 코스닥 상장사 72억원을 빼먹은 점은 이미 사실로 확인됐다. 친동생이 웅동학원을 상대로 소송사기를 벌여 100억원대 채권을 만들었고, 교사 채용 비리 과정에서 억대 금품을 받은 점도 마찬가지다.

반면 조 전 장관에 대한 수사가 과도했다는 지적도 일리가 있다. 너무 많은 검사가 지나치게 오랫동안 수사했다는 점은 검찰이 되짚어야 할 부분이다. 최강욱 의원은 본질이 ‘인턴증명서 허위작성’이지만, 작성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돌고 돌아 대학입시를 방해했다는 업무방해 혐의를 적용했다. 아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미국 조지타운대 업무가 방해됐다는 혐의도 과잉기소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진영은 모 아니면 도로 나뉘어 있다. 조국 전 장관이 무고한 희생양이 됐다는 구도와, 검찰 수사의 무결성을 주장하는 논리는 양립할 수 없다. 이미 서초동은 사회의 거대한 콜로세움이 됐고, 양쪽 진영은 출구를 닫아놓은 지루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른바 ‘검언유착’ 의혹사건도 마찬가지다. 검찰이 이 사건에 적용한 혐의는 강요미수다. 피해자는 1조원대 사기범 이철이라는 사람이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현직 검사장과 종편 방송사 기자가 자신을 노린 범행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의혹의 근거를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 반면 이 사건에 연루된 기자가 취재윤리를 위반한 것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이 사안의 실체가 무엇이냐보다 ‘추미애파’와 ‘윤석열파’ 중 어느 쪽이 이기는지에 쏠려있다.

소설 남한산성에서 조정의 대신들이 논쟁을 벌이지만, 성안에 갇힌 채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허공을 오가는 말(言)에 불과하다. 말로 언쟁을 벌이던 지체 높은 이들은 초병의 추위를 달래줄 거적때기를 걷어 말(馬)의 먹이로 준다. 병사의 손발이 얼어도 지위의 상징인 말은 살려야 한다. 하지만 고기가 되어 사람들의 끼니가 되는 게 대신들의 말(言)이 아니라 말(馬)이라는 설정은 이 소설의 백미다.

수많은 이가 검찰개혁과 정의에 관해 말을 쏟아내지만 결국 이 긴 논쟁의 끝은 간명하다. 과연 윤석열 검찰총장이 물러나고, 또 다른 친정부 인사가 총장이 되는 게 ‘개혁’이 완수되는 것인지, 보통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사람들이 굶어죽어가는 상황에서, 조정의 대신들이 최명길의 목을 치자고 하자 임금은 말한다. “애초에 화친하자는 명길의 말을 쓰지 않아서 산성으로 쫓겨오는 지경이 되었다고들 하면서, 이제 명길을 죽여서 성을 지키자고 하니 듣기에 괴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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