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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럴드포럼] 정비사업 논쟁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

이달 말 정부의 주택공급 대책 발표를 앞두고 재개발·재건축으로 대변되는 정비사업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정비사업 활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주택 소비자들이 원하는 지역에 원하는 품질의 주택공급을 위해서는 정비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대 측에서는 정비사업은 주택 순 증가량이 적고 투기수요를 촉발하여 주택시장 불안을 오히려 증폭시킨다고 주장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주택시장 안정화’와 관련된 수많은 논쟁에 대해 첨언하지는 않으려 한다. 반면 최근 정비사업과 관련된 논쟁에서 빠져있는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 대해 지적해 보고자 한다.

주거지 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근본적인 이유, 즉 정비사업의 목적은 무엇일까. 도시정비법 1조에 따르면 정비사업은 주거환경이 불량한 지역을 계획적으로 정비하고 노후·불량건축물을 개량하기 위해 시행한다.

우리나라 도시는 급속한 도시화 과정을 겪으면서 체계적인 계획이나 충분한 기반시설 설치 없이 시가지가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구시가지 주거지역 상당수가 열악한 주거환경에 놓여있고, 점차 슬럼화되고 있다.

서울의 한 재개발 해제지역의 경우 협소한 도로로 인해 건축행위가 불가능한 토지 비율이 80%에 육박하고, 공원 면적이 전체의 0.1%에 불과하다. 준공 후 50년가량 지나 안전, 녹물, 주차문제 등으로 인해 주거환경이 매우 열악한 아파트도 상당수다.

성장과 팽창의 시대를 지나 성숙과 쇠퇴의 시대에 접어든 우리 사회는 이러한 노후 낙후 주거지의 관리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고, 그 연장 선상에서 정비사업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비사업에 대한 비판을 보면, 상당수 사람들은 정비사업을 부도덕한 사업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헌 집 줄게 새집 다오’처럼 자기 돈 안 들이고 새집을 지으려고 하는 ‘도둑심보’라는 것이다. 또 상당수는 ‘탐욕 덩어리’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정비사업을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공익적 효과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비판임을 알 수 있다. 먼저 정비사업은 ‘공짜로 새집을 짓는 사업’이라는 프레임은 틀렸다. 정비사업은 조합원들의 토지 지분을 일반분양을 통해 매각하여 사업비를 조달하는 사업이다. 이는 지주 공동사업 등 부동산개발에서 흔히 사용되는 방식이다.

또한 조합원들은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맞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상당한 규모의 공익이 직간접적으로 창출되고 있다. 낡고 위험한 아파트나 슬럼화된 동네가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아파트단지로 바뀌고, 주택공급이 늘어나는 것은 단지 일부일 뿐이다. 개발 압력을 도심으로 향하게 하여 그린벨트 같은 미개발지를 보존하고, 외곽 개발로 인한 구도심 쇠퇴가 가속화되는 현상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무엇보다도 사업추진 과정에서 발생하는 상당한 규모의 공공기여로 인해 다수가 그 편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지자체는 인허가를 조건으로 조합에게 상당한 수준의 공공기여를 요구하는데, 특히 서울시처럼 사업성이 좋은 지자체일수록 그 양은 더욱 크다.

공공기여를 통해 주변에 없던 공원을 만들고, 도로도 확충하며, 학교, 유치원, 임대주택을 건설하고, 일부 사업에서는 현금도 낸다. 즉, ‘헌 집 줄게 새집 다오’가 아니라 ‘인허가 해 줄게 토지, 기반시설, 임대주택, 현금 다오’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정비사업의 전면철거 방식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들은 프랑스, 영국 등 선진국에서의 주민참여형, 역사문화 보존 중심의 점진적 개선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파리나 런던에서 차는커녕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만한 골목길, 쪽방같이 매우 열악한 주택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되는가.

파리는 불과 170년 전까지만 해도 도시 대부분이 폭 1-2미터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뒤덮여 있던, 어둡고 오물과 전염병이 가득했던 도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오스만 시장의 대대적인 재개발 사업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파리’는 존재할 수 있을까.

비싼 토지보상비로 인해 기성시가지에서 좁은 도로, 작은 공원을 하나 만드는데도 상당한 예산이 필요하다. 시장의 힘을 활용하는 정비사업이 아니고서는 노후 낙후 주거지역을 개선해 나갈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없다.

일각에서는 도시재생 뉴딜사업을 지목하지만, 이 사업을 통해 해당 지역에서 가장 필요한 도로, 공원 등이 확충된 사례는 거의 없다. ‘벽화만 칠하다 끝난다’는 비판, ‘재생 대신 재개발’을 해 달라는 요구가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기반시설의 대대적 확충이 필요한 노후 낙후 주거지역이 아직 산재한 우리나라에서는 정비사업은 억제되기보다는 장려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시장의 힘을 활용하는 정비사업은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추진되기 힘들다.

따라서 지금과 같이 시장 상황이 좋을 때 정비사업을 통해 필요한 곳의 주거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익성 중심의 사업추진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 또한 최소화해 나가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말이다.

이태희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부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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