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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산산책] 삼례마을 둘째딸 점순이傳

‘위인전’보다 더 진한 감동을 주는 ‘피플스토리’ 전문신문이 있다. ‘완주인생보’이다.

2019년 10월 10일자 톱기사 ‘호밀대로 만든 장석방으로 시집와 최초 여자 경로회장까지’라는 기사다.

‘학교에 다니지 못해 가을운동회에 울리는 농악대를 너무도 보고 싶었지만 갈 수 없었다. 시아버지 고향은 북한 용진군으로, 일찌감치 완주로 이사 오셨다. 우리 아버지와 친해 동네에서 술을 함께 마시곤 했는데, 아버지가 우리 둘째딸 점순이를 얻어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그 말은 결국 내 스무 살 때 현실이 됐다. 호밀대로 만든 장석을 엮어서 방에 깔아놓았을 정도로 시댁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듬직한 남편 만나 가난했지만 행복했고, 3녀2남을 낳았다. 셋째를 출산했을 땐 산후통에 시달려 스물다섯 나이에 영정사진을 찍기도 했다. 남편은 동네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나 ‘백 대장님’이라 불렸다. 하루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아 찾아 나섰더니 논에서 수렁에 빠진 경운기 바퀴를 맨손으로 들어 올리고 있었다. 옷에 흙을 잔뜩 묻힌 채 나를 보는 남편이 너무도 믿음직스러웠다. 우리 참 열심히 살았구나. 지금은 우리 동네 최초로 여자 경로회장이 됐다. 진달래학교에서 공부도 하고 있다. 앞으로 남은 시간, 남편과 내가 지금처럼만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삼례예술 문화촌 한쪽엔 책공방이 있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었던 책 찍던 옛 인쇄기계들이 퇴출당하지 않고 여전히 일하며 이 신문을 만들고 있었다. 신문사는 책공방 자서전학교다. 이 신문사의 모토는 ‘개인의 삶이 역사다. 기록하지 않은 삶은 사라진다’이다.

통영시 서피랑 바로 아래 명정동에 가면 ‘세공주거리’가 있다. 첫 번째 공주는 최고의 문학가 박경리, 두 번째는 공덕귀(윤보선 대통령 부인), 세 번째는 장차 나타날 명정동 출신 미래 여성 리더다. 고령 인구가 다수이지만 이렇듯 희망을 품은 마을이다.

거리 곳곳엔 주민 개개인의 큰 사진과 짤막한 일대기가 국회의원선거 벽보처럼 붙어 있다. 조태익 님의 인생 대자보 ‘도다리, 농어잡이의 추억’을 보자.

‘내는 명정도 소포마을 본토박이다. 한 동네서 나고 자란 처이랑 스물네 살에 결혼했재, 젊어서는 머구리배 타는 선원을 좀 했고, 농사도 좀 짓고 그리 살았다. 농사지을 때 거름이 없어나서 산 넘어 문화동까지 거름지게 지고 O푸러 다녔다. 그 시절에는 ‘딸딸이’라고 조그만 배를 타고 감시, 도다리, 망심이 잡고, 거제까지 농어 잡으러 댕기고 그랬다. 5남1녀 자식들이 다행히 잘 커주어 다 시집 장가 보내고, 이제 만고 편하다.’

지나던 아이와 어른들, 여행자들에게 이 벽보는 통영 바다만큼 재미있다. 이 마을은 인사 잘 나누는 동네로 유명하다. 모두를 저명인사로 만든 인생벽보 때문이기도 하다.

영월에 있다가 완주 삼례로 옮긴 책마을에 가면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끝내 그 꿈을 펼지지 못한 평범한 사람, 고(故) 송광용 습작만화 전시장이 있다. 2002년 영월에서 ‘옛날은 우습구나’란 주제로 열었던 전시회는 이제 삼례에서 상설화됐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후대가 그의 생전 꿈을 이뤄줬다. 입소문이 나더니 2005년 이탈리아 나폴리 코미콘 페스티벌에 초청됐다.

평범하지만 친근한 이웃의 이야기는 깊은 공감을 얻는다는 점에서 불세출의 무용담보다 큰 인문학이 된다. 삼례읍과 명정동 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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