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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2019 꼭 기억하고 싶은, 아주 작은 즐거움

한 해가 자막처럼 저문다. 시간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책상 위의 시간과 서랍 속 시간의 속도는 다르다. 여느 해 같으면 특별한 것이 없는 연말인데 올해는 꼭 기억하고 싶은 일이 있다. 한 출판사에 관한 독특하고도 특별한 기억이다.

“지난 1월 출간되었던 ‘신체, 대중들, 역량’의 개정판이 출시되었습니다. 번역과 관련 독자들의 몇 가지 문제제기가 있어 수정된 책을 다시 보내드리고자 하오니 주소를 보내주십시오.”

지난 10월 한 출판사에서 받은 문자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혹시 문자 피싱인가? 잠깐 의심하기도 했다. 나는 별 무리 없이 잘 읽었는데, 번역에 다른 의견이 있었다니. 내가 잘못 읽은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자기 확신은 위험하다. 출판사 주간과 통화를 해봤다. 책이 나온 초기에 일부 독자가 책 일부분 번역에 문제제기를 했다고 한다. 번역자와 상의, 번역을 일부 수정해 다시 찍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미 출판된 책은 바로 판매 중지 조치를 취했다. 기존의 책과 새로 찍어 보낸 책을 합하면 약 1000부 정도 된다고 한다. 출판계가 아주 어려운데 오직 책임감으로 1000만원에 가까운 손실을 감수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요로 하는 독자가 있다면 책을 내야 한다”는 게 출판사의 모토라고 했다.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칸트의 준칙을 보는 듯하다.

개정판 옮긴이 후기에서 역자는 “출간 뒤에 얼마 안 있어 개정판을 내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두 눈 부릅뜬다고 다 보이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남겼다. 서문의 ‘이기심’은 ‘자기이익’으로, 경험에 앞서(시간적 의미가 아님) 경험에 독립적인 의미를 가진 ‘선험적’을 ‘앞선 말’로 고치는 등 용어 수정이 눈에 띈다.

손성화 번역가는 “철학 서적 번역은 자료 수집도 많이 하고, 출판사 편집자도 신경써서 걸러 주기 때문에 재출간하는 경우는 드물다”며 “정말 제대로 된 출판사”라고 말했다.

철학서적은 번역 논란이 잦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독자에게 쏠린다. 뛰어난 번역가가 다시 번역하고 싶어도 이미 저작권 계약을 한 상태라 재번역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결국 독자만 냉가슴이다.

책은 인쇄된 글자만이 아니라 글자와 글자 사이의 여백이, 글자 자체의 여백이 독서를 가능케 한다. 인쇄된 종이 위의 미세한 요철도 독서 즐거움을 더한다. 글자와 여백, 종이의 요철이 어우러진 그곳에 사유의 우주가 펼쳐진다. 유한한 지면에 무한한 세계가 펼쳐진다는 게 형용모순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1과 2는 유한하지만, 그 사이엔 무한의 유리수의 세계가 들어있지 않은가.

책은 내 정신의 벽에 붙어 나 자신을 깨우는 등에(gadfly) 같은 존재다. 책은 자본주의적 상품에서 좀 벗어나 있다. 독자가 책을 선택하는 듯하지만 독자는 항상 책에 의해 선택을 강요받는다. 번역된 책이 한 종류밖에 없다면 원서를 읽지 않는 한 나쁜 번역서라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것을 보고 그것에 찬성하지만, 더 나쁜 일을 하고야 마는” 현실에서 자발적으로 개정판을 내준 출판사가 더없이 미덥다. 그들만의 정치에 신물이 나는 요즘, 생각의 관절 마디마디를 풀어주는위안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기분이다. kn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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